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간증과 신앙 고백

2006-08-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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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온갖 종류의 신앙 집회에서 흔히 간증을 듣는다. 기독교는 변화와 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와 성숙은 ‘간증’을 통해 아직 이에 이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간증이야말로 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 체험의 직접 고백이며, 동시에 듣는 이에게는 귀한 도전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앙 집회에서는 우리 모두의 신앙적 성숙과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간증을 귀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 때 간증은 대체로 크게 변화된 신앙인일수록 더 영향력이 있게 되고, 그 변화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폭발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모르거나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변화된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거나 회복되고, 곧 이어 많은 결실을 가져올 수 있었는지 증거하고자 한다. 정말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내게 귀한 깨달음을 준 형제가 있다. 오래 전 함께 주일학교의 한 부서에서 섬기던 형제라 비교적 그 분의 형편을 알고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불법체류자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며 한 때 언젠가 경찰이 되고 싶어 경찰학교를 다니고 싶어했던 청년이다.
또 그에게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지병으로 오래 전부터 고생하는 형이 있고, 이 형제를 돌보기 위해 어머니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고 계신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게 되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는 항상 친절하고 성실하여 만날 때마다 따뜻한 인사를 나누어 왔을 뿐이다.
그러던 그를 얼마전 한 집회에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사 뒤로 어렵사리 취직되어 일하고 있고 아직도 신분의 변화는 꾀하지 못한 채 아픈 형님조차 큰 회복을 보이지 못하며, 여전히 어머니는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시며 혼자 계신 아버지까지 돌보고 계신다고 했다. 한 마디로 큰 변화가 없는 것이었다. 조금 안타까워진 내 입장에서 어떻게 위로나 권면을 해야할까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 형제의 말이 내 우려와 염려를 앗아갔다.
“집사님, 괜찮아요. 저희는 감사할 뿐이에요. 제게는 영원한 아버지 집이 있는데 이 세상 어려움을 뭐 그리 크다하겠어요. 모두 잠깐일텐데요.”
세속의 생각에 매여 위로할 말을 찾고 있던 나를 참으로 깨우친 영적 스승 같은 통찰이었다. 비록 그의 삶은 현실적으로는 몇 년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 모르고 소위 간증할 만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에겐 어쩌면 그 보다 소중한 ‘신앙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지탱해온 것도 따지고 보면 한 연약한 인간의 신앙 고백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일갈한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또한 예수가 행한 이적과 기적을 가장 근거리에서 목도하였기에 간증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간증 대신에 역사적인 신앙고백으로 기독교 교회의 머릿돌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어찌 보면 세상적 성공이나 명예는 물론 부의 축적까지도 남의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처절히 나락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락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누가 간증을 기대할 수나 있었을까.
간증이 믿는 이의 변화와 성숙에 기초한다면, 신앙고백은 몰락과 절망의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사랑이요 삶이 분명하다. 더욱이 죽음을 무릅쓴 아니 죽음을 넘어선 위대한 신앙고백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기독교와 우리의 신앙도 가능한 것은 아닌지 겸손히 돌아보게 된다.

홍 영 화
(UC 리버사이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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