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라디오를 들으며

2006-08-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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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듣다가 웃음이 터져 나와 하마터면 아래 위 틀니가 몽땅 도망갈 뻔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뚱뚱하면 만질 곳이 많아서 좋다고 하라” 아마 세상 남편들에게 해주는 충고인 듯한데 정말 한국남자들 입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 만질 곳이 많아서 어쩌고 하면 듣는 쪽은 “평소에 나의 체형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이나 보다” 또는 저 사람이 무슨 저의를 품고 아부를 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 말을 듣고 곧이곧대로 믿고 기뻐할 여인네가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남자 자신이 많이 뚱뚱하든지 혹은 뼈만 앙상하여서 진심으로 살집이 좋은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런 식으로 징그러운 말까지 동원하여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같이 있으니 좋다. 고맙다” 정도로 끝내고 지긋이 미소라도 던져주면 ‘가화만사성’을 이룰 것이다. 부부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미치도록 사랑한다며 죽네 사네 난리를 치고 요란스럽게 만나던 부부도 “살다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었노라”고 실토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50년 결혼을 하고 재산목록 1호로 아끼던 라디오는 신랑의 동기생이 고물상을 돌아다니며 부품을 모아 손수 정성껏 조립하여 결혼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니스 칠까지 말끔히 하여 신품 같았다.
6월25일 주일예배가 끝나자 한경직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38선 전역에서 김일성 군대가 쳐들어와서 격전중이니 휴가 나왔던 군인은 소속부대를 따질 것 없이 지금 거리에 세워진 군 트럭으로 모이라” 광고가 끝나자 교회 안은 웅성웅성 시끄러워지며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뭐 김일성 군대야 가끔씩 내려와 집적거리지 않습니까?” “아니 이번엔 심상치 않은 것 같애. 휴가 나온 군인들까지 소집하는 걸 보니”
서둘러 거리로 나왔다. 큰길에 군 트럭이 줄을 지어 서있고 군복 입은 청년들이 훌쩍 훌쩍 뛰어오르니 트럭은 꼬리를 물고 떠난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라디오를 켰다.
가슴이 떨리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데 라디오에서는 “정부를 믿고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끼니때가 돌아와도 먹을 생각이 나질 않아 라디오만 쳐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고물 부속품을 조립한 라디오는 찌직찌직 하며 잡음이 심했으나 하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우리는 다음에는 무슨 말이 나올 지 알면서도 행여나 신나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라디오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서 이틀 밤을 새우고 27일 오후가 되어 언니가 달려왔다. “태능 뒷산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길에는 피난민이 넘쳤는데 이 집은 왜 태평이냐”며 함께 떠나려고 왔단다. 라디오만 쳐다보며 밖에 나가보지 않았으니 날벼락이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작은 보따리 한 개씩 이고 피난길에 올랐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마당에 라디오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보 제1호를 잃었다. 아직까지 지니고 있었더라면 소장가치가 꽤 높아지지 않았을까? 우스갯소리지만… 그 라디오는 체신부 장관을 지낸 고 배덕진 장군의 수공예품이었다.
라디오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혼자 살면서부터니 벌써 6년이 넘었다. 혼자 히히거리고 낄낄대고 하며 라디오와 친해지니 세상일을 앉아서도 훤히 안다. 얼마나 고마운가. 다이얼을 고정시켜 놓고 귓전을 스치는 소리들을 흘려들으며 팔을 움직인다. 그러다 듣고 싶은 대목이 나올 차례다 싶으면 살짝 볼륨을 올린다. 번듯하게 볼만한 작품이 어디 그리 쉽사리 나오는가.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 없는 것이 화가의 길이니 이렇게 슬슬 피곤하면 쉬고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찾아먹고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그렇게 사는 자신이 행복하기만 했었다.
어느 날 새벽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다리가 세워지질 않아 퐁당 주저앉고 말았다. 대바늘로 찌르는 듯한 무서운 통증이 다리 오금을 세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릴 때 시골 저자거리에서 본 아저씨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이제 내가 그렇게 되겠구나!” 양쪽 무릎에 가죽을 대고 두 손바닥에 일본 나막신을 끼고 잘도 기어다니더니 나는 이렇게 늙었으니 기어다닐 힘이 있을까? 푸수수한 회색머리에 얼굴에는 까만 딱지 투성인 초라한 내 모습이 왠지 웃음이 나와 한참 웃다보니 어느새 눈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퍼질러 앉아 오래오래 눈물을 쏟았다.
5개월이 지난 지금 여러 고비를 넘겨 이제는 지팡이도 떼고 모진 고통은 없어졌으니 마음 편히 라디오를 즐기고 있다. 미합중국에 감사하며 나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큰절을 올린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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