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스타리카 인디언에 복음전파 17년 ‘열매’

2006-08-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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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의 수도 샌호제에서 차로 네 시간 떨어진 곳에 해발 3,820미터 치리뽀 산이 있다. 500년 전 스페인 군대의 총칼을 피해 도망친 까베까르 인디언 1만여명이 사는 곳이다.
그 산 중턱에 제1교회가 있다. 거기서 하루 내내 걸어가면 한 교회가 보인다. 유일한 이동 수단은 다리니 걸을 수밖에. 거기서 다음 교회까지 또 하룻길. 그렇게 교회 열 곳을 돌려면 빨라도 열흘이 걸린다.
박성도 선교사는 이 산골짜기에 교회 10개를 짓는데 17년 세월을 쏟았다. 탯줄 하나 끊을 줄 모르던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던 32세 청년이 쉰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89년 신학교를 마치고 선교지를 고르던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코스타리카였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스페인어 한 마디 못 했지만 그냥 그 곳으로 떠났다.
코스타리카는 라틴아메리카의 스위스로 불릴 정도로 평온한 곳이다. 하지만 박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리스트에 나오는 까베까르족을 찾는 모험을 감행했다. 정부가 지정한 인디언 보호 구역이라 외부인의 거주가 금지된 곳이지만 그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첫 발을 디뎠을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친 이가 없었다. 박 선교사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주며 옷이 피부를 보호해준다는 걸 가르쳤다. 문명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종족은 고유 언어를 썼기 때문에 박 선교사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눈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먹는 거라곤 바나나뿐. 집이라고 해봐야 얼기설기 엮어놓은 지붕 아래 나뭇잎을 깐 게 전부다. 지금은 박 선교사가 보내준 옷을 걸치고 살기도 하지만, 여전히 신발은 신지 않는 종족이다. 깊은 산중이라 밤은 춥기 때문에 박 선교사가 보내는 가장 귀한 선물은 담요다.
“위생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죠. 피 묻은 손으로 바나나를 주물러서 만들어 주던데 처음에는 기가 막히더군요. 그래서 교회를 지으면서 근처 마을에 간이 상수도를 연결해줬죠. 이제는 간단한 샤워도 하면서 사는 걸 보면 흐뭇합니다.”
한 남자가 박 선교사를 집으로 부른 적이 있다. 집에는 아내가 오랜 세월 병들어 누워있었다. 박 선교사는 기도를 한 뒤 타이레놀을 줬다. 사흘간 약을 먹은 그 여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지금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박 선교사와 부인 순옥씨가 마켓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지은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가 2,000명을 넘었다. 아이들을 들춰 업고 고개 넘어 교회에 오면 그 날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신자들은 다 교회에서 잔다. 이들을 먹일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이 산 속에 퀸시제일장로교회에서 클리닉도 올해 세웠다. 바로 옆에는 학교도 있다. 박 선교사가 17년 전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다. 교회는 모두 인디언 종족 출신 목사와 전도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는 혜택 그 자체입니다. 문명을 접하고 약품을 얻는 통로죠. 지구가 둥글다는 진리조차 모르던 인디언 종족에게 예수와 구원을 전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17년은 보람찼습니다.”
박 선교사는 영화 같은 자신의 선교 인생을 11∼13일 나성서부교회(1218 S. Fairfax Ave., LA, 90019)에서 간증한다. 문의 (323)939-7331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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