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삼겹살과 소주

2006-07-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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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에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수은주가 110도를 넘어서 남가주가 절절 끓었던 지난 주말, 우리 집은 삼겹살과 소주로 이열치열 땀을 내며 더위를 달랬다.
사실은 소주 한 병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한국서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처음처럼’ 한 병이 어쩌다 내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보자마자 삼겹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우리 집은 삼겹살이나 고기구이를 자주 먹는 편도 아니고, 더더구나 소주는 생전 마시지도 않건만 소주를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삼겹살이 생각난 것은 대한민국이 공인한 찰떡궁합 회식메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삼겹살을 좋아하는가 하면 천하장사 개그맨 강호동 같은 사람은 아침식사 때 삼겹살을 구워먹는다 하여 화제가 되었고, 뒤이어 ‘주몽’의 송일국 마저 “나도 강호동처럼 아침에 삼겹살을 먹는다”고 고백하여 전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다이어트할 때 가장 뿌리치기 힘든 유혹 1위가 ‘회식자리에서의 삼겹살과 소주 한잔’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으며, ‘삼’자가 두 번 겹치는 3월3일은 ‘삼겹살 데이’라 하여 국가적으로 삼겹살 소비를 권장하고 있는 정도다.
한국에는 삼겹살을 전문으로 하는 ‘삼겹살 카페’나 ‘삼겹살 바’도 많다고 하고 ‘삼사모’(삼겹살을 사랑하는 모임)니, ‘삼겹살과 소주’니 하는 동호회의 회원들은 수시로 모임을 가지면서 맛있는 삼겹살 집을 찾아내 ‘삼겹살 전국 지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 한편 나는 사실 삼겹살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자라면서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거부감이 있는 탓이다. 같은 한국사람이라도 집집마다 먹거리 문화가 조금씩 다른데, 우리 친정에서는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김치찌개도 소고기나 멸치를 넣고 끓였고 만두조차 소고기를 넣고 만들었으므로 돼지고기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고 아예 그 맛을 모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졸업하고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우리를 대접한다고 구이상을 차려주셨다. 그런데 상에 오른 고기가 오직 삼겹살 한 종류뿐이었으니 그때의 당혹감과 낭패감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골이 나서 한구석에 앉아 있는데 친구들이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파무침과 쌈장과 함께 상추에 싸서 우적우적 먹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침이 꿀꺽꿀꺽 넘어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고기에 대한 나의 순결을 내던지고 한 점 입에 넣은 것이 삼겹살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의 식습관이란 평생을 가는 법인가 보다. 나는 아직도 구이집에 가면 삼겹살보다는 소고기에 먼저 손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에어컨을 틀어도 시원하지 않던 지난 일요일 오후, 한인타운의 정육점에서 유기농 흑돼지 삼겹살을 두 판 사왔다. 요즘은 삼겹살과 묵은지를 함께 먹는 것이 유행이라 마켓에서 묵은지도 한포기 사왔다. 상추도 씻고 쌈장도 만들었다.
여러 가지를 다 함께 구울 경우 불판이 비좁아 불편하므로 두군데로 나누어 구이에 돌입했다. 전기구이판에는 양파와 삼겹살을 올리고 따로 넓적한 팬에 포일을 두른 다음 김치, 생마늘, 호박을 썰어넣고 오븐의 그릴에서 구워냈다. 호박은 이번에 처음 구워봤는데 양파나 마늘과는 또 다른 달큰한 맛이 기막히게 맛있고도 고기와 썩 잘 어울렸다.
두툼한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 적당히 익었을 때 가위로 썩썩 잘라 기름기가 빠지도록 바싹 구워먹으니 고소하게 씹히는 맛이 환상이다. 삼겹살만 실컷 먹겠다고 작정을 하고 먹었는데도 남편과 둘이서 15달러짜리 한판을 다 먹지 못했다.
‘처음처럼’은 어땠냐고? 지난 봄 한국에 다녀온 친구가 “소주 맛의 신기원이 열렸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하는 것을 들었던 터라 호기심과 기대가 대단했는데 사실 나는 소주 맛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것은 도수가 낮아서인지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깨끗해 쉽게 넘어가더라는 것, 소주의 상징인 ‘캬~’ 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 처음처럼의 첫 소감이다.
오븐에서는 김치와 마늘을 굽고 불판에서는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먹다보니 소주까지 들어간 차에 안팎으로 얼마나 열이 나던지, 한여름 땡볕에도 보송보송하던 내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열치열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 한번 그렇게 열을 받고 나자 밤늦게까지 계속된 더위를 거뜬하게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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