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천경자의 환상여행’ 을 읽고

2006-07-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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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신간 한 권이 왔다. 표지를 보자 “천선생이 또 책을 내셨구나. 몸져누우셨다고 듣고 있었는데 글을 쓸 만큼 회복이 되셨으니 정말 잘 됐다” 그런데 찬찬히 훑어보니 작은 글씨로 ‘천경자 평전’이라고 쓰여있지 않은가? 흰꽃과 노랑꽃으로 장식한 갈색머리에 우수가 빗긴 회색 계통의 프로필, 슬픈 오른 눈이 똑바로 나를 보고 있다.
‘채색과 풍물로 독창적 화풍 일군, 천경자의 환상여행, 정중헌, 나무와 숲’ 모조리 훑어보아도 이 책은 ‘천경자 예술에 대한 평전’을 제삼자가 쓴 것이다.
책을 받아들고 무척 긴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50여년간 내가 가늘게나마 본업화가 노릇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용광로와도 같이 불타오르는 천선배의 예술혼이 앞장서서 본이 되어 주었기에 나도 화가로 살다 붓을 든 채 가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천경자 선생은 참 정직한 분이었다. 1960년 12월 ‘동남아 미술사절단’이 떠나게 되었을 때 대표 5명중 여류화가 한명을 넣기로 했다며 협회로 나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나가보니 사실은 천선생이 못 가겠다 하여 대타로 나를 부른 모양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천선생더러 “내가 얼마나 혼났다구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는데 왜 안 가셨어요?” 했더니 즉각 “사랑을 잃을까봐…” 보통 그렇게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천선생 수필집에 의하면 당시 홍대에 출강했는데 데이트 장소를 대전에다 정하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가고, 유부남인 애인은 광주에서 출발하여 대전역에서 내려 겨우 몇시간을 함께 사랑을 불태웠노라고 씌어 있어서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렇게 솔직한 대답이 즉각 돌아올 줄은 짐작도 못했으므로 몹시 당황하였다.
천경자 선생의 있었던 일들을 정직하게 아름답게 엮어가는 글 솜씨는 읽는 사람의 넋을 빼먹는 마력 같은 것이 숨어 있어서 부도덕이나 방종 같은 낱말이 끼여들 틈새를 주지 않는다. 그저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선생의 글을 읽고 휴우~ 한숨을 내쉬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가 된다. 선생은 그렇게 하여 채곡채곡 책으로 엮었다. 화가 중 천선생 만큼 많은 책을 낸 사람은 없지 싶다.
문화부 기자를 37년이나 지냈다는 저자는 천경자 예술에 대해 군더더기를 부치는 것을 극도로 삼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기에 천선생의 책들을 기자의 예리한 눈으로 한장 한장 살펴가며 원문을 살려 생동감을 주었다. 누구나 이 책을 한번 들면 끝을 볼 때까지 놓지 못할 것 같다. 일반이 알고 싶어할 내용들이 너무 많으니까.
수화 김환기 선생이 파리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미협 모임이 끝나고 수화선생이 천선생과 김정숙(조각)선생 그리고 나 세사람을 데리고 충무로 맥주집에 들어갔다. 나는 알코올 냄새도 못 맡는 체질이라 한쪽 모서리에 앉아 구경을 하고, 세분은 큰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봐요. 얌전한 척하지 말고 한잔 쭉 들이켜 보라구요. 교회 다닌다고 빼는건 아니겠지? 나는 목사님 며느리라구” 김정숙씨가 한 말이었다. 천선생은 한쪽 손을 들어 입을 반쯤 가리고 조용조용 한마디씩 끼고는 시원스레 들이키고… 수화선생은 파리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30대였던 우리에게 파리는 함부로 밟을 수 없는 꿈의 나라였다.
약수동에 살 때 한묵씨가 파리로 떠나기 전 천선생과 두분이 “홍대에서 출발하여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노라”며 대문을 들어섰다. 마침 손님이 놓고 간 양주병이 있어서 두분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얘기도 많이 하고 한묵씨는 취기가 오르니 흥이 나서 시낭독을 하는데 “부나비라 하오!”하며 울부짖던 모습이 생각난다.
천선생이 ‘한’이라는 수필집을 들고 오신 것이 나의 몇번째 개인전이었던가? 나는 작품이라고 내놓기는 부끄러우나 화가로 살기 위해 쉬지 않고 붓을 든 흔적을 보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개인전을 해왔다. 그러다 막상 선배 화가들이 화랑에 나타나면 주눅이 든다. 마치 무대 위에 발가벗고 나선 것 같은 지독한 수치심이다.
그때도 그랬다. 외국에 나가 살며 얼마나 공부했나 좀 발전이 보이나, 격려도 해줄 겸 오셨을텐데 나는 몸둘 바를 모르고 쩔쩔 매고 있었다. 그 버릇은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는다. 부족한 대로 회수로는 열두번이나 개인전이랍시고 치르었는데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천선배의 당당한 모습이 그래서 더욱 그립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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