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6-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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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풀이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난 금요일, 피 말리는 스위스 전에서 한국이 패하여 16강 진출이 좌절되자 몇몇 기자들은 정신적으로 공황상태를 보였다.
경기 시작 전에는 너무 흥분을 하여 밥들도 제대로 먹지 못하더니, 너무나도 명백한 심판의 편파 판정 후에 우리가 지고 나자 다들 허탈해서 말도 나누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대~한민국!’ 응원이 하늘을 찌르던 편집국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것은 물론, TV를 아예 꺼버리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 채 다들 컴퓨터만 째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싸늘하게 한마디했다. “그런 놈은 총이 아니라 칼로 죽여야돼. 아주 날카로운 사시미 칼로.”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아니야, 날카로운 칼보다 무딘 칼로 죽여야해. 더 고통스럽도록.” 이어 또 다른 의견이 나왔다. “손에 피 묻힐 것 없이 독침을 쏴버리지.”
놀라지 마시라. 이게 모두 여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들이다. 그것도 평소에 너무나 예쁘고 착하고 발랄한 여기자들, 이 중에는 이번 월드컵이 시작될 때까지 ‘오프사이드’(offside)가 뭔 지조차 몰랐던 사람도 있다. 하긴 나도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업사이드’(upside)인 줄 알고 심판이 깃발을 들고 내리는 일과 관련된 용어라고 생각했으니까.
축구보다 훨씬 고상한 취미를 가졌던 우리 요조숙녀들을 이토록 섬뜩한 살인마로 만들어버린 월드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더 무서운 일은 집에 돌아가서 당했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 두 명의 남자 조카들이 놀러왔다. 언니의 아들과 동생의 아들, 그리고 나의 아들과 남편까지, 덩치 큰 남자 네 명이 무지막지하게 밥을 먹으면서 월드컵 패배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더니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한 네 남자가 “차라리 나가서 우리가 축구를 하며 화를 풀자” 이렇게 된 것이다.
공을 들고 나간 남자들이 우왕좌왕, 갈팡질팡, 이리저리 공을 차는 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설거지를 하였다. 네사람 저녁 해먹인 부엌이 왜 그렇게 정신 사납던지 거의 30분 걸려 설거지를 끝낸 다음 내방에 들어가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클린징 크림을 찍어서 얼굴에 바르는 순간이었다.
‘뻑!’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뭔가 내 주위에서 사방으로 튀고 날았다. 화장대 바로 옆 유리창이 축구공에 맞아 깨지면서 파편이 온 사방으로 튄 것이었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는 ‘쨍그랑’이나 ‘와장창’이 아니라 ‘뻑!’이었다. 처음에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가 사태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이유도 너무나 크고 탁한 굉음 때문이었다.
컴컴한 창문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괜찮아?”하고 남편이 묻는다. “안 괜찮아. 방안이 난리가 났어. 뭐가 어떻게 된거야?” 나의 힐난이 두려운 남편은 얼른 “원겸이가 찬거야”하며 책임을 돌린다. 누가 찼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방안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유리조각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일단 서있는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옆에 놓여있던 양말을 줏어 신었다. 연중 내내 발 시려워 하는 나는 침대 옆에 늘 큼직하고 두툼한 양말을 상비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양말을 신은 후 쓰레기통을 들고 우선 큰 유리조각들을 줏어 담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은 유리창이 얼마나 확실하게 깨졌던지, 유리조각들이 매스터 베드룸 곳곳에 안 튄 데가 없었다. 화장대는 물론이고 침대는 이불과 베개, 러플, 침대 밑까지 파편을 뒤집어썼고 저 멀리 옷장 속까지, 심지어 화장실 안에서도 파편이 나왔다.
이불을 들고 밖에 나가 털고 온 아들과 조카는 손이 여기저기 찔리고 무수한 스크래치를 입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만큼 아무 소리를 못했다. 온 방안을 샅샅이 배큠하고, 이불 빨래를 돌리고, 깨진 창에 마분지를 오려붙인 후에야 응급조치는 일단락 되었다.
불행중 다행이었던 것은 공이 유리창만 깨고는 창틀에 맞아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었다. 만일 공이 창을 뚫고 들어왔더라면 화장대 앞에 서있던 나를 맞혔을 것이고,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유리파편들 속에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내 목이나 가슴을 찔렀다면… 엘리손도 심판보다 먼저 이 세상을 하직했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16강 진출 못하고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지, 4년 후에는 또 무슨 일을 겪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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