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6-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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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카드

아버지날에 프랑스 전이 열리는 것을 알게 된 아들은 파더스 데이 카드를 직접 제작하겠다고 귀띔했다. 월드컵에 한창 열광해 있는 아빠에게 그냥 일반적인 카드를 건네기가 좀 그렇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바로 전날 밤까지 미처 카드를 사놓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지만 일단은 기특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들은 카드 앞장에는 태극기를, 속에는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박지성을 그리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내 주위를 계속 맴돌며 ‘박지성을 그려야지, 박지성을 그려야해’라고 중얼거린다. 날보고 그려달라는 뜻이다. 할 수 없이 아들 방에 둘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박지성을, 아들은 태극기를 그렸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림 솜씨가 조금 있는 편이라 아들의 숙제며 프로젝트는 언제나 내 차지다. 특히 무엇이든 똑같이 그리거나 만드는 일을 잘하기 때문에 몇시간 동안 연필과 색연필, 칼과 자를 들고 끙끙거린 후에는 아들과 남편이 입을 딱 벌리는 작품을 만들어내곤 한다. 아들 이전에는 언니의 두 딸이 학교 다닐 때 그들의 프로젝트가 내 몫이었다.
박지성이 빨간 티셔츠와 흰색 팬츠를 입고 공을 차는 모습을 그렸다. 양말도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색 양말을 신겼다. 내가 그림을 끝내자 “박지성이 몇 번이야?” 아들이 묻는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인 척하고 물어보니 7번이란다.
“럭키 세븐이래” 가르쳐주자 아들은 박지성의 티셔츠 가슴팍과 바지에 7을 써넣었고, 축구공을 그려서 오린 다음 카드를 열면 툭 튀어나오게 팝 업(pop-up) 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맨 위에는 한국말로 ‘대한민국!!!’ 이라고 써넣었으니 이게 도대체 아버지날 카드인지, 월드컵 승리기원 카드인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카드가 탄생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박지성 카드에 깊이 감명 받은 눈치였고, 그것이 중요한 이유라도 되듯 일찍부터 설쳐대었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리는 합동응원장에 가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남편은 여러 가지 마음의 준비며, 파킹이며, 줄서서 입장하기 등등 번잡하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남편과 아들이 머리에 빨간 스카프까지 동여매고 스테이플스 센터로 떠나고 나자 나 역시 혼자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며 응원해야할 것 같았고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이해해주실 것이라 굳게 믿었다.
재미없었던 전반전 경기는 나도 건성으로 대충 보았다. 그러나 후반에 접어들어 패색이 짙어지자 내가 나서야할 것 같아지면서, 슬슬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꽥 지르며 선수들을 야단쳤는데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느 순간 박지성이 살짝 건드리는 슛으로 동점골을 넣는 것이었다. 바로 내가 카드에 그린 그 모습, 그 발 동작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전화가 왔다. 이미 목소리가 간 남편은 너무 감격해 거의 우는 것 같았다. “여보, 박지성이 해냈어. 박지성이 찬거야, 박지성이 살렸어”
아들은 자기가 파더스 데이 카드에 박지성을 그렸기 때문에 파더스 데이에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고 무척 흥분해서 떠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그린 것이 절대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분명히 1 대 1로 비겼는데 마치 승리한 것처럼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으니 말이다.
이제 금요일 정오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가 남았다. 토고가 스위스에 졌으니 우리는 결단코 스위스에 이겨야만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 실력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특별한 운이 따라줘서 16강에는 기필코 진출했으면 좋겠다.
우리 특집 2부 여기자들은 그날 월드컵 붉은 악마 패션으로 출근하기로 했다. 빨간 티셔츠에 머리에는 뿔을 달기로 했고 누구는 삼지창까지 들고 오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런데 그날 점심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나는 사실 그 문제가 가장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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