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6-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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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복습

남편은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빨간 티셔츠를 입고 교회로 떠났다. 토고전 합동응원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덜대면서 스쿨버스에 올랐다. 아들 역시 빨간 티셔츠 차림으로 등교했다.
초반에 한 골 먹었다가 이천수가 프리킥 동점골을 터뜨리자 전화벨이 울린다. 감격으로 목이 메인 남편의 성급한 승전보, 이어 안정환의 슛에 경기장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자 나는 수업중인 아들에게 전화 메시지를 남겼다. “원겸아, 우리가 이겼어! 코리아 원! 예이~~”
축구팬도 아니고 월드컵에도 열광하지 않는 내가 이렇게까지 되기에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대망의 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오는데도 전혀 마음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남편은 끓어오르는 흥분과 열정을 혼자 가누기 힘들었던지 나를 붙들어놓고 ‘2002 월드컵 복습’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아침, 첫 경기부터 악을 쓰는 소리에 잠을 깬 내가 비척비척 기어 나와 소파에 앉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디오테입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녹음해뒀는데… 분명히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 갔지? 아, 여기 있다!” 4년전 영광의 장면들을 한데 모은 KBS 하이라이트 테입이었다. 정신이라도 차리고 보자는 나의 의견을 완전 무시한 채 남편은 곧장 해설로 들어갔다.
“첫 경기가 잘 풀렸던거야. 폴란드 경기 후반에 황선홍 첫 골이 들어갔을 때 얼마나 감격적이던지… 유상철까지 넣어서 2대0으로 우리가 이겼잖아. 저때까지만 해도 월드컵에서 1승이라도 올려보는게 우리 소원이었다구”
그 다음 미국 전에서 1대1로 비긴 한국팀이 안정환을 선두로 ‘오노 세리모니’ 펼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어 포르투갈 전, 박지성이 멋진 테크닉으로 왼발 슛을 성공시킨다.
“저런 절묘한 골이 이번에도 나와줘야 하는데… 박지성이 가슴 트래핑으로 잡아서 여유있게 집어넣는 저 테크닉은 정말 일품이야. 저거 봐, 막 달려가서 히딩크 품에 안기잖아. 그래서 히딩크가 데려간거라구. 그땐 저렇게 어렸는데 지금은 얼마나 의젓한지…”
드디어 16강 진출, 가장 드라마틱했던 이태리 전이 시작되었다. 초반에 안정환이 패널티 킥에 실패하고 비에리의 헤딩골을 허용, 사기가 떨어졌던 한국팀은 경기종료 3분 남겨놓고 설기현이 동점골을 쏘자 거의 폭동이라도 난 것 같았다.
“설기현이 오는 볼을 그냥 때렸기 때문에 들어간거야. 골키퍼가 손 쓸 새도 없이 차야지, 골 잡아서 시간 끌면 늦는다구. 차두리 오버헤드 킥도 정말 멋있었는데… 그게 들어갔으면 대단했을거야” 연장 25분만에 안정환의 헤딩슛으로 역전승을 거두자 경기 해설자는 “세상에 이럴수가! 세상에 이럴수가!”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저 반지 세리모니 때문에 반지의 제왕이라고 불리잖아. 저때 안정환이가 얼마나 마음이 편했겠어. 자기가 패널티 킥을 잘못 차서 질 뻔했는데 마지막에 한골 넣었으니 말이야. 쟤가 원래 뺀질이라 열심히 안 뛰는 앤데 저 날은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무지하게 뛰었어. 찬스도 많았는데 다 놓쳐서 더 초초했을거야.”
드디어 8강전, 승부차기까지 갔던 스페인전이 시작됐다. 후반까지 0대0으로 맞서다 승부차기가 시작됐다. 황선홍,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 홍명보 순으로 한 골씩 차기 시작한다.
“사실 축구팬 입장에선 승부차기까지 가는게 제일 재미있지, 우리가 이운재 선방으로 한 골 막아서 이겼잖아. 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그래, 그래, 바로 저거다. 이운재가 방향을 제대로 잡은거야. 저걸로 그냥 끝난거지.”
아무도 안 믿겠지만 4년전 저 승부차기의 중차대한 순간에 나는 졸고 있었다. 내 기억에 그때가 새벽 두세시쯤 됐었는데 초저녁부터 친구들과 열심히 먹고 마시고 수다떨었던 나는 경기 중간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고, 갑자기 귀청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서 깨보니 누군가 나를 얼싸안았는데 TV에 ‘4강 진출’이라는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모두다 아는 얘기. 그리고 앞으로도 대충은 모두다 아는 얘기가 될 것이다. 4년전엔 정말 운이 좋았지 않나. 홈경기였고, 히딩크가 있었고, 뜨거운 응원이 대한민국 전체를 달구어 그 기운이 선수들을 신들린 듯 뛰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아무튼 그래도 대한민국,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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