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6-06-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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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해요

간밤에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하도 울어서 눈이 어찌나 부어 있는지 회사 직원들 보기가 민망해서 방문을 꼭 닫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밀알의 밤’ 행사를 하루 앞두고 가만히 뒤돌아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아니었음 엄두도 못 낼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진단이 나오지 않았으면 어찌 ‘승욱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고, ‘밀알의 밤’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승욱이를 이만큼 키우게 뒷바라지 해주신 아버지와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자꾸 느껴진다. 아버진 군대에 장교로 계시면서 부대 안에 총기사고로 옆구리와 겨드랑이 사이에 관통상을 입으셨다. 그때 엄마가 언니를 낳은 지 백일 되던 때에 아버진 생사를 오가면서 하나님께 아들이라도 낳고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아버진 독자셨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소중함이 크신 분이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그때 들으시고 히스기야 왕보다도 20년을 넘게 덤으로 더 살게 해주셨다고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에도 아버진 굉장히 담대하셨다. 아버진 총도 맞아보고, 암도 걸려보니 암이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만큼 암이 무서운 병이란 것 난 안다.
사무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자랄 땐 쑥스러워서 못했고, 결혼해선 워낙 아버지와 가깝게 살아서 말할 기회가 없었고, 승욱이가 태어난 후에는 승욱이 바라보는데 온 정신이 가 있어서 아버지와 대화조차도 많이 하고 살지 못했다.
왠지 오늘은 꼭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퇴근 후에 병원으로 향하면서 계속 연습을 하고 갔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했어요, 아빠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사랑한다는 말이 어찌 연습으로 될까마는 그래도 100번을 머릿속에 되 뇌이며 아버지 병실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오늘 하루도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버지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아버진 진통이 계속 되는지 진통제를 시간마다 맞고 계신다. 이 상태로 내일 ‘밀알의 밤’에 오실 수는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아버진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신다. 암이 어디로 전이가 됐는지를 찾으려고 계속해서 검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아버지도 많이 지쳐 계신다. 만약 암세포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뇌에라도 들어가면 아버지와 대화도 못 나눌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아무리 기회를 엿보아도 가슴에서만 말이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마침 언니도 일을 마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진 우리 두 자매를 앉혀 놓으시고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속에선 빨리 ‘사랑한다’고 말을 하라고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하는데 아버지가 언니하고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나보고 오늘은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지금 이대로 가버리면 또 언제 용기가 날지 모른다. 난 병원 문을 나서기 전 “아버지 집에 가기 전에 아버지 손잡고 기도할께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와 난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렇게 귀한 아버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 후에 왜이리 미리 목이 메이는지 잠시 침을 삼키고 “하나님, 제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많이 사랑해요”라는 기도를 드렸다. 내 손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의 손이 떨리면서 “딸아, 내도 니를 사랑한다, 내 훌륭한 딸. 이 아빠도 널 사랑해.”
아버진 의사가 5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을 때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어떤 무서운 암 진단보다도 더 강력한 말이 “사랑합니다”라는 말일까? 아버지가 계속 흐느끼며 눈물을 그치질 못하고 계신다. “사랑한다” 말하기가 왜 그리도 어렵고 긴 시간이 흘렀는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이 말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부녀의 그동안 말못할 섭섭함, 부족함, 어려움의 모든 것이 한번에 씻겨 내려가는 말… 그건 어떤 값어치있는 보석도 아니고, 큰돈도 아니다. 단지 그냥 입으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사랑합니다”라고…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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