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6-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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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드디어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배심원에 소환된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 근 20년을 살면서 배심원에 한번 안 걸려봤다면 그도 놀랄 일이겠지만, 어찌 됐든 나는 지난 주 화요일, 법원이란 곳에 처음 가보았다.
그러고 보니 LA다운타운을 수없이 지나다녔어도 1가와 힐에 위치한 법원 건물에 들어가본 것이 처음이요, 판사가 높이 올라 앉아있는 코트 룸에 들어가 배심원 석에 앉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신참 기자시절에 무슨 사건 취재차 법정에 드나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게 여기였는지 다른 코트였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어쨌든 나는 생전 처음 같았다.
누군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 두 가지가 세금과 죽음이라고 했지만, 나는 ‘미국시민으로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세가지는 세금과 죽음과 배심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배심원에 소환되는 일은 누구나 피할 수 없고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다. 미국인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우리는 변변치 못한 영어까지 부담이 되니 주위에서 누가 배심원에 걸렸다하면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를 서로 묻고 걱정하고 노하우를 주고받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되는 것이다.
배심원 소환제도는 요즘 들어 아주 강경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영어를 못 한다고 하거나 회사에서 페이 해주지 않는다고 하면 봐줬는데 이제 그런 사유는 통하지도 않고 오히려 판사에게 ‘영어도 못 하면서 어떻게 미국시민이 됐느냐’고 야단만 맞는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루 대기하다가 운 좋게 빠져나올 수 있으면 가장 좋고, 운 나쁘게 뽑힌들 내가 뭘 어찌할 것인가. 바로 몇 달전 남편이 배심원에 뽑혀서 6일동안이나 LA법원으로 출퇴근했던 것을 보아온 터라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치사하게 잔머리 굴리지 말고 시민의 의무를 다하자는 비장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아침 8시, 배심원 대기실에 들어서니 한 200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대부분 짜증스럽거나 지루한 표정. 여기서 기다리다가 이름이 불리면 30명씩 판사실에 들어가 배심원 선정작업에 참여하게되고, 떨어지면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또 다른 케이스에 호명되어 나가기를 반복하다가 이날 하루 아무 케이스에도 안 걸리면 ‘무죄’ 방면되는 것이었다.
나는 오후 2시께 73호실에서 열리는 민사 케이스에 호명되었다. 담당판사는 이베트 팔라주엘로스라는 아름다운 판사였다. 얼마나 이지적인 미인이던지 나는 ‘저런 여자가 왜 배우가 되지 않고 저기 앉아있을까’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하며 넋을 놓고 그녀를 구경했다.
케이스는 두 히스패닉 운전자 사이의 자동차사고 의료비 과다청구에 관한 것이었다. 양측 변호사는 우리에게 이 케이스는 이틀이상 끌지 않고 빨리 종결지을 예정이니 부담 갖지 말고 협조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배심원 선정은 거의 1시간반 이상 소요되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12명씩 배심원 석에 올라앉아서 자신의 거주지, 결혼여부, 직업, 남편 직업, 자녀 유무, 배심원 경험유무에 관해 말해야했고 판사의 추가 질문이 뒤따랐다. 나의 소개가 끝났을 때 그 아름다운 판사가 물었다.
“언론인이라고 했는데 주로 무엇에 관해 쓰는가, 혹시 법적인 문제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는가?” 나는 “20년 이상 기자생활을 했기 때문에 커버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지금은 생활칼럼과 와인칼럼을 쓰고 있다. 법적인 분야에 관하여는 직접 쓰지는 않지만 외부칼럼 필진들인 여러 분야의 변호사들과 친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다면 네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떠나서 열린 마음으로 이 케이스를 심리할 수 있겠는가?”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물론이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측 변호사는 각자 자기에게 부담되는 후보를 하나씩 솎아내었고 그 자리를 대기중인 다른 후보들이 채웠다. 새로운 후보들은 또 자기소개, 판사의 질문, 변호사의 솎아내기… 그들은 후보를 갈아치울 때마다 “00번에게 감사한다”는 것으로 나가달라는 말을 대신하였다. 감사는 누가 할 일인데…
벌써 10여명이 빠져나가도록 나의 번호 6번은 불리지 않았다. 이제 꼼짝없이 걸렸구나, 하고 있는데 판사가 “더 이상 바꿀 후보가 없는가” 묻자 피고측 변호사가 “6번에게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할렐루야!
기자였기 때문에 덕을 좀 본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틀에 끝날 재판이라면 배심원 경험도 한번쯤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떨어졌다고 하니 동료들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떻게 했는데?” “뭐라고 했는데?”
“그냥 묻는 대로, 사실대로만 이야기해.” 항상 정공법이 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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