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5-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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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계

지난 주 토요일 한국일보 스타일(Style) 섹션에 실린 아름다운 고부의 이야기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우리 특집 2부의 이주현 기자가 가정의 달 어머니 주일을 맞아 기획 취재한 기사였다. 해마다 좋은 어머니, 훌륭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든 터라 나까지 전화통에 매달려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등 애를 썼다.
찾아보니 드물긴 하지만 그런 고부 사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된 것은 좋은 고부관계의 열쇠는 거의 100% 시어머니에 달려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집에 사이좋은 고부간이 있다고 하면 그 관계는 전적으로 시어머니가 훌륭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바로 글을 쓴 이주현 기자의 경우, 취재 대상을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시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친정어머니보다 시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훨씬 편하다고 말할 정도여서 가끔 이야기를 듣다보면 너무 부럽고 놀라운데 정작 본인은 그게 얼마나 좋은건지, 그러기가 얼마나 힘든건지를 잘 모르고 “다들 그런거 아닌가요?”라는 투의 무심한 코멘트를 날려 야단을 바가지로 맞곤 하는 것이다.
며느리가 아무리 착해도 시어머니가 심술을 부리면 좋은 고부관계는 절대로 형성될 수 없다. 반대로 며느리는 좀 철딱서니 없어도 시어머니가 감싸주고 덮어주면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시어머니가 아무리 잘 해주어도 못 되고 망나니 같은 며느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고부간의 갈등이라 할 때의 문제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모든 평범한 여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인자하고 희생적인 어머니가 등만 돌리면 야박하고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되는 것, 평소 다정하고 이성적인 누이들이 따박따박 얄미운 시누노릇 하는 것, 딸이 살림 못하는 것은 안쓰러워도 며느리가 못하면 흉이 되는 것, 사위가 설거지하는 것은 대견하고 아들이 설거지하는 것은 눈꼴사나운 것 등등, 우리 안에 들어있는 대단히 모순되고 이중적인 감정들이다.
내 생각에 고부갈등은 입장의 차이 플러스 본능적인 감정의 충돌이다. 그러니까 입장 바꿔 생각하고 본능을 극복하여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하는 고부간은 진정으로 성숙한 인격체의 만남이라고 본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열쇠는 시어머니가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할 때 ‘어디, 시어머니가 얼마나 잘해주나 보자’는 마음으로 시집가는 여자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반면 많은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맞을 때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마음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것,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대 아니면 30대 초반의 처녀, 그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 내가 그맘때를 생각해보아도 너무나 한심하고 철딱서니 없고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나이다. 더구나 남편을 선택하여 결혼한 것이지 시집 식구들을 선택한 것이 아닌데, 가뜩이나 어려운 시어머니가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고 스트레스를 주면 시집은 갈수록 싫어지게 된다. 그럴 때 인생 경험이 풍부한 시어머니가 지혜롭게 가르치고 다독여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고부갈등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깊은 걸 보면 정말 본능적인 감정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우리 시어머님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있었고 많은 일을 겪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편안한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엄청 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의 관계는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나를 무조건 봐주시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외로우신걸 뻔히 알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전처럼 자주 음식을 해드리거나 용돈을 많이 드리지도 못하며, 어느 모로 보나 결코 잘하는 며느리가 아닌데도 어머니는 무조건 ‘니가 너무 바빠서 그렇지’‘우리 숙희 최고다’ 칭찬만 되풀이하신다. 그리고 그게 진심이라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제는 편안해진 것이다.
우리 아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남자라면 나도 언젠가는 며느리를 맞게될 것이다. 그때 나도 입장 바꿔 생각하고 본능을 극복하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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