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독교 역사로 보는 오늘의 교회 ⑩

2006-03-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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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필리오케 논쟁과 교회의 분열

■9세기 주요 사건일지
▶ 800 샤를마뉴 대관식
▶ 809 아켄 종교회의
▶ 830 콘스탄티노플 대학 재정립
▶ 831 이슬람, 소아시아지역 침공
▶ 843 베르딩 조약
▶ 867 동, 서 교회 분열
▶ 876 바이킹, 영국 침공
▶ 882 교황 존8세, 살해
▶ 897 교황 스테판6세, 살해
▶ 900 교황 베네딕트 4세 선출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독교 교단과 교파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한 분이고 같은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교단과 교파들로 나눠졌는지 간혹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9세기는 교회의 대 분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 교회 분열은 필리오케(Filioque)라는 어휘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필리오케란 “성자로부터”(and from the Son)란 뜻의 라틴어인데 성령의 근거를 표현하는 이 말 때문에 동·서방 교회는 신학적으로 팽팽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두 교회는 완전히 나눠지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의 신성을 논하며 삼위일체설을 정통 교리로 받아들었던 325년 니케아 신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니케아 신조에 “… 성령 또한 주님이시며 이는 생명을 주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 받고 영광 받으시며...”이라는 구절을 추가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동·서방 교회의 해석에 차이가 있었다.
즉, 동방 교회는 성령의 근거를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From the Father and through the Son)으로 해석을 했는데, 서방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From the Father and from the Son)로 해석했다.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동방 교회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으로만 해석한 반면, 서방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해석을 했던 것이다.
9세기 들어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했던 샤를마뉴 황제는 신학적인 혼돈을 정리하겠다면서 “필리오케를 인정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이로 인해 다시 한번 동·서방 교회 사이에 성령 논쟁의 불이 붙었고, 결국 867년 동·서방 교회 분열(The Schism of Photius)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사실, 이런 미묘한 문구해석 차이로 인한 분열은 교회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피할 수 있었던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샤를마뉴 황제의 정치적 개입으로 교회는 신학적 견해 차이를 표방한 세력과 이권 다툼으로 대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이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서방 교회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동방 교회가 전신인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16세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Protestant) 등 크게 3가지 교파로 분류된다. 그런데 분열과 분파는 여기는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계속되는 신학적 이견과 이권 다툼으로 인해 기독교 내의 교단, 교파는 무려 1만여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데 갈라지고 나눠지는 교파, 교단의 배후에는 대개의 경우 교리상의 이견을 표방한 이권, 세력 다툼이 내재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은 참으로 완전하신 분인데 예수를 구주로 섬기는 인간들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으로 인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Irresistible Grace of God)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신앙 고백을 다시 한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백 승 환 목사
<예찬 출판기획 대표>
baekstephe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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