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탈에 선 아이들 북악산의 하루

2006-03-04 (토)
크게 작게
한국에서의 여러 사역 일정이 잡혀서 한 달 전에 다녀왔다. 숨이 헉헉 막히고 좁아터진 비행기 좌석 안에서 이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저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열 시간이 넘는 시간 정말 죽을 맛이었지! 그래도 30년 넘는 세월을 넘어서 어린 시절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내 마음은 열 몇 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친구들하고 북악산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 날 따라 보통 날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함께 가게 되었고 나는 보통 때보다도 친구들에게 폼을 잡아 더욱 터프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을 궁리했다.
마침 저쪽에 물이 꽤나 많이 고여 있는 웅덩이의 끝자락이 절벽을 그리며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폼을 잡으려 말했다. “야, 나는 말이야 무서울 게 없어. 잘 봐” 하며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두 팔을 쭉 펴고 평행을 유지하면서 웅덩이 끝자락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이 황홀과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망상 속에 우쭐한 마음으로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중심을 잡으며 열심히 걷고 있었다.
순간 문득 친구들의 휘둥그레진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거만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아차, 그만 중심을 잃고 쭉 그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다.
“이그그… 이제 난 죽었구나” 한참을 미끄러지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돌부리에 머리가 깨지거나 거꾸로 처박혀 코뼈가 나가든가 큰일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둔탁한 것과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그것을 타고 줄떡 미끄럼을 타듯이 물 속으로 떨어졌다.
별다른 충격이 없어 “아, 살았구나 다행이다”하며 물 속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보는 순간, 어떤 아저씨가 완전 누드 바람으로 물 속에 벌렁 자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개울아래서 목욕하고 있던 아저씨의 목 위에 깃털(?) 같이 가벼운 내가 떨어져준 것이었다.
아저씨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아마도 충격으로 목을 다친 듯 싶었고 ‘윽’하며 외마디 한마디 못한 채 나를 째려보며 끙끙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 정말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을 망설이는 동안 친구들은 계곡 아래로 정신없이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저씨를 함께 건져내었다. 옷을 홀딱 벗고 있으니 일단 옷을 입혀야겠는데… 도저히 옷이 입혀지지 않았다. 결국 아저씨의 옷으로 중요한 부분만 둘둘 말아 팔, 다리, 머리, 사지를 나누어 들고 병원으로 옮기려고 서둘러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 녀석이 “너 이제 큰일 났다. 너 이제 경찰에 잡혀 들어갈 거야. 이제 영호는 큰일났다, 큰일났다. 너 아저씨가 저렇게 다쳤으니 미국 가기는 다 틀렸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금시라도 경찰에 잡혀들어 갈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어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우리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저씨를 산밑에 버려 두고 도망했다. 그 아저씨를 누군가 병원에 데려다 주길 소원하면서 말이다.
과연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난 것일까? 한국을 향해 가는 비행기 속에서 그 때의 일이 생생히 떠오르며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으실까? 그저 용서만 바랄 뿐이다.
수많은 추억들을 태평양 하늘에 그려가며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옛날의 김포공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작은 개울 속에 개구리, 맑은 공기… 이런 것들은 머나먼 옛 기억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제 한 사람의 목사로 조국의 땅을 밟으며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며 잠시 사방을 둘러본다. “흠, 아무도 북악산 사건으로 날 잡으러 나온 것 같지는 않군”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힘차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한영호 <나눔선교회 디렉터>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