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3-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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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지난주 주방일기 ‘여보 당신, 오빠’에서 쓴 한국인의 호칭 문제에 관하여 독자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자신도 동감하는 이야기라 잘 읽었는데 결론이 없다고 지적하신 그 분은 부부간의 호칭도 그렇지만 각종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어떻게 부르는게 좋은지 좀 연구하여 알려달라고 하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을 어떻게 불러야할 지 애매해요. 가족도 아닌데 언니, 그럴 수도 없고… 또 손아래 사람이 날보고 언니, 그러는 것도 싫더라구요. 그러자니 형님, 동생 할 수도 없고, 때에 따라 자매님, 이렇게도 불러보는데 그것도 적절한 호칭 같지 않아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권사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별로 좋게 들리지 않네요”
사실은 바로 최근에 나도 같은 일로 잠시 고민했다. 지난 목요일 조하연씨(웨스트LA의 가구점 ‘블루 프린트’를 운영하는, 산타바바라에 멋진 별장을 지었다던 바로 그 분이다)의 초대로 디즈니 콘서트홀에 갔었다. 디즈니 홀 내 ‘파티나’ 레스토랑에서 풀코스 디너를 함께 하고, 곧이어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콘서트를 감상하며 입과 귀가 한껏 호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두시간 남짓 식사 중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를 계속 하연씨, 하연씨 이렇게 불렀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달리 뭐라고 불러야 좋을 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고 나니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다음날 땡큐 카드를 쓰면서 말미에 추신을 이렇게 적어 넣었다.
“하연씨라고 부르니 건방지게 느껴지는데, 달리 뭐라고 부를 지 모르겠어요. 언니, 이럴 수도 없고, 조사장님, 이러면 더 싫어하실 것 같아서…”
한국사람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문화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호칭에 무척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호칭이 제대로 정돈돼있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하다.
경로사상이 뿌리깊은 탓인지 우리는 손위사람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씨’를 붙인다해도 무례하다고 여긴다. 때문에 사람을 처음 만나면 반드시 서로 ‘탐색’의 시간을 갖는데 이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야만 대화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람을 만나서 비즈니스에 쓰는 시간보다 ‘이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많은 경우도 있고,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은 상대방을 ‘그쪽‘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호칭 문제는 정말 좀 정리돼야할 것 같다.
가족끼리는 관계에 따른 호칭이 있고, 친구 사이에서는 이름을 부르며, 학교나 직장, 교회에서는 상대방의 직위 직분에 따라 선생님, 교수님, 부장님, 국장님, 권사님, 장로님 하면 되는데 혈연·지연·학연에 관계없이 만나게 되는 지인들은 서로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예를 들어 취미 클래스에서 만난 전업주부들, 마라톤 동우회의 회원들, 노인학교의 학생들, 하다못해 남편 동창회에 따라간 아내들은 서로 무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
모범답안은 없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사적으로 만난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름을 물어본 후 이름 석자에 ‘씨’자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나는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어서 나보다 많이 어린 여성이나, 열살 이상 나이 많은 사람에게도 친구가 됐으면 다 성을 빼고 ‘아무개씨’ 이렇게 부른다. 아마도 나랑 친구가 된 사람들의 성격이 대체로 비슷하여 호칭에 신경 쓰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도 이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한국의 여자들은 오랜 세월 이름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더욱더 호칭에 불편해진 것 같다.
나의 제안, 중년이상 여성들의 경우 위아래 5년차 사이에서는 서로 편한 대로 ‘아무개 씨’ ‘아무개 님’ ‘미세스 김’ 등이 좋겠다.(‘미세스’ 호칭은 요즘 이혼한 여성도 많으므로 사용에 주의) 나이가 아주 많고 친구사이가 아닌 사람에게 ‘~씨’하기는 어려우므로 그런 경우에는 이름 뒤에 ‘선생님’을 붙이거나 이름을 모를 경우 그냥 ‘어르신’ 하면 무난할 것이다.
나는 또 ‘선배’라는 호칭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선배’는 기자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를 막론하고, 무조건 입사 순서에 따라 관습적으로 쓰는 호칭인데, 굳이 학교나 직장 선배가 아니라도 우리는 모두 누구에겐가 인생 후배나 선배가 아닌가.
호칭 문제는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며 어려워서 결국 또 결론 없는 글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된다고 했는데 우리의 호칭 제도는 사람을 ‘꽃’으로 만들기가 정말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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