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2-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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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오빠?

엊그제 남편 친구의 생일을 맞아 가까운 다섯 집이 모였다. 다섯 부부 열명에다 각기 한둘씩 되는 아이들까지 다 모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잘 먹고 마시고 얘기꽃을 피우다 돌아왔다.
부부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편이 “여보!”하고 나를 불렀다. 그랬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느끼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니, 서로 여보라고 불러요? 우린 아직도 그런 말 안 나오는데…”
한 사람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맞아, 좀 그러네요”하며 맞장구를 친다. 졸지에 느끼한 부부가 된 우리는 좀 당황하여 “그럼 서로 뭐라고들 부르는데요?”하고 물었다. 그 때부터 각 집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나머지 집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라고 부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모두 50을 바라보는 40대 후반의 중년부부들인데 ‘여보 당신’이 어색하다는 데서 나는 무척 놀랐다.
우리 부부는 결혼 초창기 때부터 여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놀라면서 신혼 때 어떻게 그런 구닥다리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었는지 신기해한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이유는 남편이 먼저 불렀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나와의 결혼을 손꼽아 기다리던 남편은 연애시절 ‘여보’ 소리가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전화를 걸면 ‘여보~’하고는 한참 있다가 ‘~세요’ 하면서 예비남편 노릇을 즐기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여보 소리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남편이 나를 ‘원겸이 엄마’라고 부른다면 더 싫을 것 같다. 남편에게 나는 자기 아들의 엄마이기에 앞서 아내이기 때문이다.
요즘 부부들이 ‘여보 당신’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여보 당신 하던 우리 부모세대가 로맨틱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가부장적 시대를 살던 어머니 아버지들은 아무 감정표현 없이, 본받기 싫은 부부의 모습으로 여보 당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보·당신, 아무개 엄마·아무개 아빠보다 더 싫은 것은 ‘오빠’라는 호칭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애인과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특히 한국 TV를 보고 있노라면 드라마건, 게임이건 어디서나 남편과 애인을 오빠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오빠’는 동의어요, 대한민국 표준어가 돼버린 것같다.
우리 편집국의 젊은 여기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남편에게 다들 오빠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이 굉장히 귀에 거슬린다. 왜냐하면 바른 말도, 적절한 말도 아닐 뿐 아니라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진짜 오빠가 있는 여자의 경우 진짜 오빠를 무어라고 부르는지, 또 아내가 남편보다 연상인 경우는 어떠한지 정말 궁금하다.
그럼 무어라고 부르냐고? 여보 당신이라는 순 우리말이 징그러우면 차라리 이름을 부르던지, 이름 부르기가 건방지게 느껴지면 둘만의 애칭을 만들어 부르면 되지 않을까? 미국서는 미국이름을 많이 사용하니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한 호칭은 그뿐 아니다. 한국식당이나 상점에 가면 가끔 종업원이 나를 보고 ‘언니’라고 하거나 ‘어머니’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남자 손님에겐 아버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런 동생이나 딸을 둔 적도 없을 뿐더러 그 종업원은 언니와 어머니가 도대체 몇 명이란 말인가. 세상 모든 손님이 다 자기 어머니요, 아버지인가? 하긴 오래전부터 한국의 여대생들이 선배 남학생들에게 형, 형 했던 것을 생각하면 호칭 잘못 쓰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다.
같은 경우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부르는 호칭 중에 고쳤으면 하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신의 조부모를 일컫는 말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모든 노인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심지어 기자들조차 기사 쓸 때 60세만 넘은 사람이면 ‘김 할머니는…’ ‘박 할아버지는…’ 이라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쓰는데 아주 못마땅하다. 요즘 60~70세는 노인도 아닐 뿐더러, 그 분들이 모든 독자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더구나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자기 가족에게만 붙이도록 돼있는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오빠, 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아무나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 그런 것인가?
요즘 ‘상상플러스’라는 한국TV 프로에서는 현재 잘 쓰지 않는 우리 고유의 말을 찾아내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는데 안 쓰는 말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잘 못 쓰는 말 고치는 일에도 좀 앞장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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