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힐수록 맛좋은 ‘묵은 지’ 요리법

2006-02-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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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은 ‘고향의 맛’

톡 쏘는 신맛 아삭아삭 씹히는 맛 ‘예술’

미국 속담에 친구와 와인은 오래될수록 좋다는데 요즘은 김치도 예외가 아니다.
먹기 직전 양념에 쓱쓱 비벼만든 겉절이보다 ‘묵은 지’라고 불리는 삭을 대로 푹 삭은 김치가 인기를 얻기 시작, 어느새 트렌드 먹거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골칫거리로 여겨졌던 신 김치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묵은 지란 오래된 김치를 뜻하는 말로 ‘지’는 김치를 일컫는 사투리. (그러므로 ‘묵은 지 김치’라고 말하는 것은 ‘역전 앞’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김치를 너무 강조(?)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묵은 지가 바로 신 김치?’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맞다. 하지만 묵은 지를 단순히 신 김치로 취급(?)하는 건 묵은 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선 묵은 지가 신 김치와 가장 다른 점은 오랜 숙성기간. 신 김치야 김치를 담가 냉장고에 넣어둔 지 몇 주정도만 지나면 손쉽게 만들어지지만 묵은 지는 1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익혀 만든다. 더구나 1년이라는 시간동안 제대로 익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군내가 나거나 배추가 물러져 먹을 수 없게 된다.
기간 못지 않게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 가장 신경 써야할 요소는 다름 아닌 온도. ‘저온숙성’ ‘발효과학’ 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동원되어 김치 맛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묵은 지의 맛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익히지만 배추의 아삭함은 그대로 살린 채 양념이 푹 배어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곰삭은 맛이 유지되는데는 무엇보다 정확한 온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치가 가장 잘 익는 온도는 6℃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오랜 시간 숙성하는 묵은 지는 0-4℃ 사이에서 익혀야 맛있는 묵은 지가 된다.
또한 묵은 지는 처음 소금에 절이는 단계부터 일반 김치와 다르다.
평소 김치 담그듯 소금에 절이면 1년이 지나 꺼내먹을 때쯤 되면 너무 짜서 못 먹게 된다는 것. 또한 젓갈이나 액젓을 넣으면 배추가 물러져서 아삭한 맛이 나지 않는다.
김치냉장고가 있는 가정이라면 집에서 담근 김치를 묵은 지로 만들 수 있는데, 김치 냉장고의 온도를 6℃ 정도로 맞추고 한두 달 정도 지나면 묵은 지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란 배추와 양념으로 김치를 담그면 정확한 온도에 넣어 익혀도 한국에서 담근 김치로 익힌 묵은 지의 맛을 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묵은 지가 인기 먹거리로 부상되어 요즘은 손쉽게 묵은 지를 살 수 있다. 묵은 지만 담가 파는 전문 웹사이트도 많이 생겨났고 묵은 지를 이용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포장 김치로 유명한 종가집에서도 묵은 지 김치를 따로 출시, 판매할 정도다.
한국 뿐 아니라 한인타운에도 묵은 지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 명성이 자자한 묵은 지의 맛을 보기 위해 얼마 전 채프만 플라자에 새로 문을 연 묵은 지 전문 한식당 ‘새벽집’을 찾았다.
오픈한 지 얼마 안됐지만 한번 먹으면 계속 먹고 싶어지는 묵은 지의 묘한 매력에 빠진 손님들과 소문 듣고 처음 찾아온 손님들로 항상 북적댄다.
“묵은 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인 김치인데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김장독에서 갓 꺼낸 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밥 위에 얹어주던 추억까지 더해져 묘한 향수를 일으키는 음식입니다. 물론 오래 동안 발효되어 건강에 좋은 건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새벽집 알렉스 민 사장의 설명이다.
묵은 지 요리의 맛을 좌우하는 제대로 삭힌 김치는 100% 한국에서 들여오고 이곳에서는 보관에 주력한다. 김치를 보관하는 창고형 냉장고 온도를 0-4℃로 유지해야 그 맛이 신선하게 보존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수해와 냉장고에 잘 넣어둔 묵은 지 한쪽을 떼어 맛을 보니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듯 톡 쏘는 신맛에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예술’ 그 자체다. 이 김치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비우는 건 문제도 아니겠다 싶었는데, 묵은 지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또 다른 미각을 자극한다.
묵은 지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선보인 요리가 있으니 다름 아닌 묵은 지 찜. 푹 익어 곰삭은 맛이 나는 묵은 지에 돼지목살이나 삽겹살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 약한 불로 푹 졸이듯 쪄내면 김치에는 돼지고기의 고소함이 배고, 돼지고기는 김치 양념 때문에 부드러우면서도 짭조름해져 밥 한 공기가 금세 동날 정도로 맛이 기막히다.
돼지고기 대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꽁치와 고등어를 넣고 조려도 환상적인 맛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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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포기에 싼 삼겹살을 하루 정도 항아리에 넣어 숙성시킨 다음 구워먹는 항아리김치 숙성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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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지에 돌돌 말아 싼 돼지고기를 전골냄비에 끓여 먹는 돼지고기 묵은 지 찜.


새벽집에서 서브하는 묵은 지 찜은 묵은 지 김치에 두툼한 돼지 삼겹살을 돌돌 말아 싸고 커다란 전골 냄비에 두부와 야채를 넣고 함께 끓이다 어느 정도 익으면 김치와 삼겹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준다.
특별한 양념 없이도 육수에 묵은 지 국물만 조금 부어서 끓이면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국물 맛이 우러난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인기 메뉴는 항아리김치 숙성삼겹살. 묵은 지를 포기사이에 두툼한 생 삼겹살을 하나씩 올려 김치로 돌돌 싼 다음 항아리에 넣어 하루 정도 숙성시킨 것. 보통 삼겹살 먹듯 김치와 함께 구워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김치 양념이 돼지 삼겹살의 잡냄새를 없애줄 뿐 아니라 김치의 신맛과 돼지고기의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무리 많이 먹어도 느끼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입맛 없을 때 또는 마땅한 반찬거리 없을 때 잘 익힌 묵은 지 한 포기로 가족들의 입맛을 공략해보는 건 어떨까. 지금부터 1년을 기다릴 수 없다면 종가집 묵은 지(나오는 시즌이 있다)를 사다 먹거나 새벽집에서 들러 묵은 지 요리를 한번 맛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묵은 지로 만드는 간단 별미
국수… 부침개… 만두… ‘묵은지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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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은 지 소면국수
▲재료: 소면 600g, 묵은 지 ⅓포기, 실파 3뿌리, 달걀 황·백지단·소금 약간씩, 참기름 1큰술, 다진 마늘 ½작은술, 설탕·식초 2작은술씩, 통깨 ½큰술, 멸치국물(멸치 10마리, 다시마(10×10cm) 2장, 생수 4컵, 국간장·소금 약간씩)
▲만들기: 묵은 지는 소를 대충 털어내고 잘게 송송 썬다. 실파는 손질하여 송송 썬다. 잘게 썬 배추김치에 송송 썬 실파와 참기름, 다진 마늘, 설탕, 식초, 통깨, 소금을 넣어 고루 무친다. 냄비에 멸치, 다시마를 넣고 물을 부어 끓이다가 물이 끓어오르면 다시마는 건지고 멸치는 약 5분간 팔팔 더 끓인 뒤 건진다. 여기에 국간장을 넣어 색을 내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끓는 물에 소면을 넣고 삶아 건져 물기를 없앤 뒤 그릇에 나눠 담는다. 만들어둔 육수를 붓고 무쳐둔 묵은 지와 달걀지단을 고명으로 올려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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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은 지 부침개
▲재료: 묵은 지 ½포기, 간 돼지고기 100g, 다진 파·다진 마늘 ½큰술씩, 달걀 2개, 밀가루·물 ½컵씩, 김칫국물 2큰술, 소금·후춧가루·깨소금 약간씩, 식용유·참기름 적당량씩
▲만들기: 김치 잎은 소를 털고 국물을 짠 뒤 송송 썬다. 볼에 간 돼지고기와 다진 파, 다진 마늘, 깨소금, 참기름,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골고루 버무린다. 여기에 밀가루와 소금, 송송 썬 김치, 김칫국물, 달걀을 넣고 골고루 섞어 반죽을 만든다.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반죽을 한 국자씩 떠 넣어 고르게 펴서 지진다. 가장자리가 익으면 뒤집어서 마저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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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은 지 만두
▲재료: 다진 돼지고기·불린 당면 300g씩, 묵은 지 800g, 두부 400g, 숙주·다진 양파 200g씩, 고기양념(설탕 ½큰술, 간장·깨소금·다진 마늘 1큰술씩, 다진 파·참기름 2큰술씩, 소금 1작은술), 만두피
▲만들기: 다진 돼지고기는 종이타월로 말아 핏물을 뺀 다음 고기양념으로 밑간 한다. 불린 당면은 물기를 빼고 잘게 다진다. 묵은 지는 소를 털어 잘게 썰고 두부는 으깨 물기를 짠다. 숙주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쳐 물기를 꼭 짠 뒤 송송 다진다. 큰 볼에 다진 양파와 준비한 재료를 모두 넣고 골고루 섞어 만두소를 만든다. 만두피에 만두소를 1큰술 정도 얹고 만두를 빚어 김 오른 찜기에 약 10분간 쪄내면 완성.

글 성민정·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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