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 두만강

2006-02-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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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친은 만세사건 전력을 지워버리고 딴 사람으로 살아가려니 해방이 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함경남도 외가에서는 사위 이름이 바뀐 것을 몰랐으므로 전보를 치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는데 여러 날이 지난 후 할아버지 앞으로 소상한 편지를 보내와서 그제야 부고가 배달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무척 슬퍼하시며 17년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시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글을 알게 된 후 메이지대학 강의록이라는 책이 뒷방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버지는 독학으로 토목건축 기사도가 되어 꽤 정도 높은 실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시내에 집을 사시고 기숙사라시며 우리를 맡아주셨는데 여름방학이 되어 5학년인 언니와 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보낸 청년을 따라 기차를 탔다. 우리는 ‘무산’이라는 작은 역에서 내려 꽤 먼 거리를 걸었다. 동네를 벗어나 내 키보다 더 자란 풀밭을 가르며 앞만 보고 열심히 걷는데 그 길이 다한 곳에 희뿌연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청년이 “큰비가 온 후라 물이 더러워졌다”며 ‘두만강’이라고 했다.
두만강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건너편 만주 쪽은 시커먼 바위산이 깎은 듯이 절벽을 이루고 그 꼭대기에 박힌 소나무들이 무성하게 그늘을 드리워 강폭을 반이나 점령하였으니 8월초인데도 오싹할 정도로 추위를 느꼈다.
우리는 기다란 나무배에 올랐다. 청년과 뱃사공은 앞뒤에 서고 언니와 나는 담요를 두르고 가운데 꼭 붙어 앉았다. 작은 목선들이 쉴새없이 끼여들면서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큰 나무들을 엮은 뗏목도 유유히 지나가고… 그 날의 두만강은 바쁜 편이라고 했다. 담요를 쓰고 잠이 들었던 우리는 배가 출렁하는 바람에 눈을 뜨니 저녁 노을이 타는 선착장이었다.
근래에 와서 “밤에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탈북자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날 일을 떠올리게 되는데 70년이나 지났으니 산세도 지형도 많이 변했지 싶다. 그 몇 해 후에 나온 김정구의 ‘두만강 뱃사공’이란 노래를 나는 즐겨 부르는데 사실인즉 내 머리 속의 두만강은 푸른 물도 아니고 옛 사람을 그리는 사람도 없지만 한 가지 그날 밤 두만강 가의 초가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직껏 잊지 못하며 살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창 밖에서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적단이 왔다- 마적단이 왔다-” 외치며 누군가가 동네 한복판을 달려갔다. 어머니는 재빨리 방 한구석에 있는 큰 옷장을 밀어내고(속은 비어 있었다) 벽에 붙은 쪽문을 열고 언니와 나를 밀어 넣은 다음 얼른 자신도 들어왔다. 뒤에서 누군가가 옷장을 다시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그만 호롱불이 타고 있을 뿐 ‘바삭’ 소리도 날세라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한데 언니의 창백한 얼굴을 건너다보니 더욱 무서워져서 나는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
“엄마, 마적단은 도둑놈들이야?” “말을 타고 떼지어 나타나니까 마적단이 왔다고 소리지르지만 이곳 사람들이 말해 주는데 두 가지라 하더라. 중국 산적과 조선 독립군…” “독립군이 뭔데?”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우리 나라가 약하니까 일본이 깔보고 먹어버렸어. 억울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지 하고 그런 대로 살고 있는데 단념하지 않고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저 두만강 건너에 있대. 저쪽은 땅이 아주 넓고 산에 나무도 많아. 몸을 숨기기 위해 그 쪽에 있지만 가끔 이쪽으로 말을 타고 몰려온대. 대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김일성 장군인데 만주로 도망 와서 독립군을 만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대단한 분이라더라”
나는 육군사관학교가 뭔지 궁금했다. 5학년인 언니의 설명인 즉 “일본에서 제일로 씩씩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장교가 되는 학교”란다. 나는 훌륭한 학교를 나와 장교까지 된 사람이 나라를 찾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다는, 언제나 백마를 타고 나타난다는 김일성 장군을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일설에 의하면 2차대전 말기에 일본 특무에게 잡혀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소련이 만만치 않을 것 같으니 김성주 쪽을 택하고 없애버렸다고도 했는데 그 진상을 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해방이 되자 소련군함을 타고 원산 부두에 내린 30을 갓 넘긴 애숭이 김일성은 “인민에게 고깃국과 이팝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며 50년이나 버틴 보람도 없이 아들 땜에 죽었다는 소문만 남기고 갔다.
아직도 두만강은 흐르고 있겠지…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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