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행 가이드 ‘곰 이야기’

2005-12-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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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가이드 ‘곰 이야기’

남가주 산간지역 하이킹 트레일에서 만날 수 있는 흑곰.

등산을 하다보면 종종 야생동물들을 만나게 된다.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등산을 하는 것이 또 등산객들의 심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안면부지의 등산객들이 등산 도중에 앉아서 쉴 때도 자기는 어디어디에서 무슨 짐승을 보았는데 어떻더라 하는 게 화제의 중심이 되게 마련이다.
나도 10여년 이상 취미 삼아 등산을 하면서 희귀한 일이 꼭 한번 있었다. 일년 중 가장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독립기념일이었다. 공휴일인데 집안에 특별히 예정된 일도 없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다. 늘 갖고 다니던 등산용 지팡이도 없이 좋아하는 노래 테입에 워크맨 하나를 끼고 샌개브리엘 마운틴 북쪽에서 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우거진 수목에다 이른 아침시간이라 기분이 여간 상쾌하지가 않다. 몇 백년이나 되었을까 수령을 알 수 없는 노송들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
노송들 사이로 이어져 나간 오솔길을 따라 귀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인적도 전혀 없는 심심 산중을 걷는 그 기분. 마음을 뿌듯하게 해준다.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이 꼬불꼬불 몇 번을 돌아야 내려온다. 중간쯤 왔을 때이다. 급커브를 돌았는데 아뿔싸 이게 무엇인가. 5미터 전방에 포악하기로 유명한 황색 곰이 내가 내려가는 길을 올라오다가 나와 맞부딪친 것이다. 나는 귀에 꽂힌 워크맨의 노래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치자. 후각과 청각이 발달되었다는 야생 곰은 왜 나를 미리 못 알아보고 이 지경을 만들었을까. 곰도 서고 나도 섰다. 나는 온몸이 굳어져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보통 등산교육에서 곰을 만났을 때는 양손을 위로 치켜들어서 가능한 대로 키가 크게 보이게 하라고 한다.
그래야 곰이 자기보다 키가 크면 덤비지 않고 피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순간엔 털끝까지 곤두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다란 눈썹 속에서 빛나는 곰의 눈과 어쩌면 사투를 벌여야 된다는 각오로 눈싸움을 하는 그 몇 초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정말 일각이 천추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결국 곰이 옆으로 살짝 빠지면서 밑으로 내려간다. 돌아서는 곰의 엉덩이가 출렁한다, 마치 물을 잔뜩 채운 두 개의 축구공 같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냥 방심할 수는 없었다. 50여미터나 내려갔을까 멀어진 후에야 소리를 지르면서 돌멩이를 들어 곰한테 던졌다. 곰한테까지 미치지도 않았지만 내려가는 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래서 내 일생에 단 한번 있었던 곰과의 눈싸움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강태화
<토요산악회장·909-628-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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