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무나 비참했던 애리조나호의 최후

2005-12-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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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비참했던 애리조나호의 최후

일본의 가미가제 공격을 받고 가라앉는 전함 애리조나호. 이 사진은 미국민의 충격을 우려하여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진은 미해군 당국 제공>


피격 10분만에 화약고 터져 함장등 1,177명이 장렬히 전사

“오아후가 오늘 아침 7시55분 일본 전투기들에게 공격당했다. 전투기의 날개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태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비공식 소식통에 의하면 일본 전투기들은 2개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50여대의 일본 비행기가 4차례에 걸쳐 진주만을 공격했으며 군 당국은 민간인이 거리에 나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번 피습으로 이 시간 현재 6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에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갖고있는 호놀루루 스타 블러튼이 1941년 12월7일 오전에 발행한 호외 제1호의 내용으로 제목은 “WAR!”라고 주먹만한 글자로 인쇄되어 있다. 이 역사적인 호외는 현재 진주만 박물관에 걸려 있으며 사본은 일반인들이 관광 기념품으로 살 수도 있다. 호외 제2호에는 사망자수가 400명으로 보도되고 있다.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호놀루루의 일간신문조차 진주만 피습의 희생자가 2,000명이 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수장된 장병수는 해군 자체에서도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사망자가 자그마치 군인이 2,409명, 민간인이 102명에 이르렀다. 일본 전투기는 50대가 아니라 423대나 되었고 2개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아카기’ 등 7개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가미가제’들이었다. 이 기습공격으로 미해군의 전함 9척이 대파되었는데 그 중 애리조나, 유타, 오클라호마는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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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메모리얼’ 벽에 새겨진 1,177명의 전사자 명단.


피해 전함 중 애리조나호만 기념하여 ‘애리조나 메모리얼’까지 바다 위에 세워진 것은 그만큼 이 배의 최후가 장렬하고 피해 내용이 비참했기 때문이다. 전체 사망군인 2,409명 가운데 거의 반에 해당하는 1,177명의 희생자가 애리조나호에서 발생했으며 시신을 75명밖에 건지지 못해 지금도 1,102명이 바다에 수장된 상태에 있다. 피해가 컸던 이유는 일본 전투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애리조나 전함의 화약고에 명중되어 폭파되는 바람에 10분만에 가라앉아 장병들이 피할 틈이 없었다. 전대사령관과 함장도 순직했다.
미국이 태평양 함대의 주력 전투함들을 잃고도 어떻게 일본과의 해상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엔터프라이즈, 사라토가, 렉싱턴 등의 항공모함이 바다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렉싱턴은 진주만 피습 2일 전인 12월5일 진주만을 빠져나가는 행운을 지녔다. 일본이 진주만의 미잠수함 기지와 연료탱크를 폭격하지 못한 것도 큰 실수였다. 연료탱크가 폭파되었더라면 미태평양 함대의 기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에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가 작전에 무게를 두지 않은 까닭이다. 이는 후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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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애리조나전함을 들여다 보고있는 관광객들. 선체 바로 위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미국은 진주만 피습에서 불타며 가라앉고 있는 애리조나, 유타호 등의 비참한 최후를 미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사망자수도 적의 사기를 높여 줄까봐 적당히 얼버무려 발표했으며 1943년에야 진주만의 참상을 공개했다.
“진주만을 상기하라.” - 이는 1958년 진주만 생존자재향군인회가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구호다. 일본이 미국을 선제 공격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며 바로 이같은 정신적인 허점의 대가를 치른 것이 진주만 피습이다. 12월7일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미국에게는 두고두고 치욕적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이 철 <이사>
c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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