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셀폰의 최후

2005-10-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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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이를 집으려고 상체를 구부린 순간 셔츠 윗 주머니에 넣어둔 셀룰러폰이 빗물 가득 찬 양동이 속으로 첨벙 빠진다. 어엇! 화면이 뿌옇게 안 보인다. 저장해둔 수십개 전화번호들…


내 오피스는 한 빌딩의 코너에 있기 때문에 두 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환자를 보다가 밖으로 시선을 주면 바로 길 건너 내 전용 점심을 파는 타코 식당이 있고 로버트 케네디 암살의 역사적 건물 앰배서더호텔도 보인다. 버몬트의 지저분한 뒷골목으로는 주인한테 야단맞고 시무룩해진 종업원들이 잠깐 나와서 한숨 쉬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들어가는 간이 의자들도 있다. LA라는 대도시의 삶이 그 두 개 유리창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요즘은 비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걱정이 늘었다. 우리 집에 비가 새는 것이다. 한때는 비 내리는 유리창이 낭만의 상징이더니 이제는 치과 오피스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아이구, 우리 집, 또 새겠네… 하며 현실적이 되었다.
빗줄기가 유난히 굵던 어느 저녁, 일을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큰길에서 접어드니 가로등만 빼고는 집집마다 깜깜하다. 정전이다. 어쩌나? 우리 집은 담이 있고 자동 철문인데…
집 앞에 와서 리모컨 오프너를 아무리 눌러대도 전기에 연결된 철문은 안 열린다. 차를 길거리에 세우고 비를 맞으며 다시 게이트 앞으로 온다. 잠깐 사이에 흠뻑 젖는다. 담을 넘어야 한다. 담 위에 손을 얹고 체육 시간에 안장 넘기 하던 식으로 몸을 날려볼 생각을 하지만 50년이 된 노구는 꿈쩍도 않는다. 결국 아이들이 사다리를 가지고 나와서 담을 넘었다. 집 앞을 지나던 차들이 도둑인가? 하고 쳐다본다.
거실에 켜둔 희미한 촛불 사이로 빗물 받는 양동이 세 개가 놓여있다. 또로록 또독 또로록 똑똑… 드럼을 치는 아홉 살 막내가 마침 그 방에 놓인 드럼세트 앞에 앉아 양동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사이로 장단을 맞춘다.
쿵탁쿵탁 또로록 똑똑 쿵쿵탁탁 또로록 똑… 촛불 밑에서 밥은 먹었는데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집안은 으스스하게 춥다. TV도 안되고 무선 전화기도 끊겼다. 시계는 고작 8시 좀 넘었는데 에잇, 모르겠다, 차가운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튿날 아침, 밤새 비는 갰지만 전기는 여전히 안 들어온다. LA에서 산 24년 동안 이렇게 오래 정전이 되기는 처음이다. 천정이 얼마나 샜나 보러 거실로 내려간다. 나쁜 엉터리 지붕회사 같으니라구… 하면서 양동이를 집으려고 상체를 구부린 순간 셔츠 윗 주머니에 넣어둔 셀룰러폰이 빗물 가득 찬 양동이 속으로 첨벙 빠진다. 어엇! 잠깐 사이인데 화면이 뿌옇게 안 보인다. 저장해둔 수십개 전화번호들…
아빠, 햇빛에 말려보세요. 아이의 말을 믿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드라이브 웨이에 맑게 갠 LA의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그래, 여기야! 아내의 자동차 뒷 범퍼에 조심스레 전화기를 널어두고 들어와 출근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바깥 방향으로 담을 넘을 차례다. 점잖은 50세의 중년신사가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는다. 뛰어내릴 때 약간 발목이 시큰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표현은 안 한다. 얼마 후 전기가 들어오고, 퇴근해서야 아침에 널어두고 간 전화기 생각이 났다.
어머, 난 몰랐어요. 아내가 놀란 얼굴이 된다. 나는 길거리에 떨어졌을 전화기를 찾으러 아내가 다녔다는 거리를 따라 이 잡듯 추적을 했는데 한 블럭도 못 가서 뭇 차량의 바퀴에 사정없이 짓밟힌 전화기의 잔해를 발견했다. 온갖 첨단 기능으로 가득 찼던, 내 주변의 인간관계와 꾀죄죄한 비밀까지도 꼬치꼬치 알고 있는, 그러나 이젠 오징어포처럼 납작해진 셀폰의 최후였다.


김범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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