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5-09-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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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집 보던 날

애들은 캠프 가고 아내는 피정에
모처럼 맞은 자유 ‘룰루랄라’
그것도 잠시, 밀려오는 허전함에
새삼 깨달은 가족의 소중함이여

여보 미안해요. 혼자서 저녁식사랑 어떡해요? 냉장고에 준비해둔 거 꺼내서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될텐데…
아내가 집을 나서면서 계속해 미안해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캠프에 갔으니 주말에나 돌아올 것이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맞추어 아내는 천주교 수녀원에서 열리는 피정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동안 안식년을 맞은 선교사님들을 우리 집에 모시곤 했는데 아마도 거기서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는 ‘주부에게도 안식일을 달라!’고 말했다. 아니, 누가 못 가게 말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연히 내 눈치를 보던 아내는 드디어 완벽한 날짜를 찾았다고 좋아했다. 미안한 표정으로 짐을 챙기는 아내를 향해 나는 거만하게 덧붙였다. “당신, 남편 잘 만난 줄 알어!”
마지막 환자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다. 룰룰루 룰룰루우 허밍이 나온다. 아이들도, 아내도 없을, 나만의 공간을 생각하니 기분이 설레기까지 한다. 집에 도착했다. 차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도 게을러빠진 개는 제 집에 누운 채 고개만 삐끔 내다본다. 엊그제 두툼한 매트리스를 사다가 깔아주었더니 새 이부자리가 편한지 종일 드러누워 잠만 잔다. 그래 그래, 누웠거라. 우리 한번 잔소리 없는 날들을 즐겨나 보자. 나는 방에 올라가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평소에 아내가 싫어하던 푸대 자루 같이 생긴 옷이다. 지난번에 오셨던 아프리카 선교사 한 분이 선물로 주셨는데 조이는 곳이 없어서 아주 편하다. 거울에 비쳐보니 제법 아프리카 추장 같이 생겼다.
주황색 얼룩무늬의 푸대자루를 걸치고 안경을 낀 추장이 거실에 내려와 TV를 켠다. 방학 내내 아이들에게 빼앗겼던 채널 선택권이 온통 내 것이다. 한 쪽에선 골프를 하고 또 한쪽에선 테니스 결승이다. 어쩔까 하면서 영화 채널로 잠깐 가보니 한편에선 탐 크루즈의 최신 첩보물이고 그 다음 채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미셀 파이퍼의 애정물이다. 나쁜 TV 같으니라구. 좋은 것들을 한꺼번에 내보낼게 뭐람.
이번엔 부엌으로 가본다. 과연 오븐에 넣었다가 빼면 먹게끔 테이블 위엔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 그러나 오늘만은 아니다. 나는 라면을 먹을 것이다. 라면은 아내의 혐오 식품이다. 나는 이 밤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내 멋대로 라면을 꺼낸다. 콜레스테롤 어쩌구 하는 바람에 맘대로 못 먹던 계란도 두 개쯤 푼다. 아내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음식을 잘 하는데… 힛힛힛… 알맞게 불조절을 해서 끓여낸 라면을 TV 앞으로 가져온다. 아아, 행복한 저녁. 브룬디의 왕자야, 나오너라, 나랑 겨뤄보자. 거침없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가며 라면을 먹는다.
TV 프로도 끝나고 창밖엔 어느새 밤이다.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내가 현관문을 잘 잠갔던가? 나가서 확인해본다. 2층 복도에도 불을 환히 켜둔다. 다시 TV를 돌려보지만 이번엔 볼만한 프로가 하나도 없다. 어제 읽다가 둔 베스트셀러,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을 다시 꺼낸다. 표지에 찍힌 사진 속의 저자가 잇속을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다. 오른쪽 송곳니와 왼쪽 송곳니가 다르게 생겼다. 오른쪽 잇몸이 많이 내려와 있다. 아무래도 잇몸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 이도 많이 약해져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 이런 말하면 아이구, 못 말리는 이빨 장수! 하며 나를 비웃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시끄럽게 굴던 아이들도 보고 싶다… 잠이 안 온다. 가족은 소중하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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