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말 갤러리 ‘단풍젖은 가을냄새 물씬’

2005-09-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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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주 라꽁브 작
‘밤을 줍는 사람들’

마켓에 나가보니 한국에서 수입한 햇밤이 한 무더기 쌓여 있다. 화톳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햇밤을 구워먹던 추억이 그리운 계절이다. 통통한 햇밤은 추석날 차례 상에도 꼭 오를 만큼 한 해의 결실을 대표하는 열매다.
유럽 땅을 처음 밟아 모든 게 신기하던 시절, 런던의 길거리에서 꼭 도토리 크기의 군밤을 처음 대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어머, 우리만 즐기는 주전부리인 줄 알았는데. 법도 따지기를 조선시대 사대부보다 더한 영국 신사들 역시 길거리를 오가며 입에 숯 검뎅이를 묻히면서 군밤을 먹는다는 사실은 갑자기 영국이란 나라 전체를 좋아하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프랑스 브리따니 지방에는 유난히 나이 많은 밤나무들이 많다. 벽난로 앞에는 으레 구멍 송송 뚫린 팬을 준비해 두고 식사 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나무 밑에서 주워온 밤을 구워먹는다. 유럽 다른 지역에서 역시 가을이면 밤송이가 탐스럽게 열리고 길거리에는 군밤장수가 진을 친다.
노턴 사이먼 뮤지엄의 19세기 회화 방에 가면 프랑스 화가, 죠르주 라꽁브(Georges Lacombe, 1868-1916)가 그린 ‘밤을 줍는 사람들’(사진·Chestnut Gatherers)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가 25세 때인 1893년부터 시작해 1년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졌다.
부유한 베르사이유 가문 출신의 그는 24세였던 1892년 여름을 브리따니 지방에서 지내며 나비스(Nabis)의 초기 멤버인 에밀 베르나르, 폴 세뤼지에와 조우한다. 첫 만남 이후 그는 곧 나비스의 일원이 된다. 예언자란 뜻의 나비스는 베르나르, 드니 등을 중심으로 문학의 상징주의에 호응해 결성됐던 화파. 단순화한 데생과 톤, 새로운 구도와 색채로 아라베스크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인상파의 시각 편중에 맞선 그들의 화풍은 색채의 자유로운 선택과 질서를 따른 장식화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자. 화폭 중앙의 세 여인은 밤을 줍고 있지만 그 자태는 마치 종교화 속의 성녀들처럼 거룩해 보이지 않는가. 숲에 떨어진 밤 열매와 이파리는 동일한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것 같다. 아름드리 커다란 그루터기, 지붕처럼 따뜻하게 숲을 덮어주는 나뭇잎의 조화는 마치 그대로 화석이 된 듯,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나무를 통해 보이는 지평선의 섬광은 화폭 한 가운데 여인의 후광처럼 빛난다.
본래 이 그림은 가브리엘 웬거 부인의 집에 선물하기 위해 제작됐다. 웬거 부인은 베르사이유의 돈 많은 과부로 죠르주 라꽁브의 약혼자인 마르테의 어머니였다. 가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 그림을 라꽁브는 사계 연작 가운데 하나로 제작했다. 아티스트의 애인은 예술가의 창작 혼을 팡팡 자극하는 뮤즈, 약혼자 마르테는 자연스럽게 이 시리즈의 모델이 되었다.

▲오픈 시간: 화요일 휴관. 수요일, 목요일, 토-월요일은 정오-오후 6시. 금요일은 정오-오후 9시까지.
▲가는 길: 101번 S. 쭻 2번 N. 쭻 134. E. 쭻 Colorado Bl. 출구로 나와 서쪽으로 향한다.
▲주소: 노턴 사이먼 뮤지엄(Norton Simon Museum) 411 W. Colorado Bl. Pasadena, CA 91105.
▲전화: (626)449-6840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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