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집

2005-08-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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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을 걷다보면 유난히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정말 미국 제2의 도시인가 싶어 두리번거리게 된다. 카트를 몇 개 붙여놓고 도매상에서 나온 큰 박스를 덮어씌워 지붕을 만들고 그 속에서 남녀가 엉키어 잠을 자고 있는 홈리스들의 집을 보며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한 때 내 집을 가져보려고, 내 아이들이 친구를 떳떳하게 데려올 수 있는 내 집을 마련하려고 힘드는 줄 모르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1949년 미술교사로 있을 때 수업이 끝나고 직원실에 돌아오니 건너편 자리의 이태현 선생님 앞에 3학년 박영자가 머리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영자는 나의 형부의 친척으로, 평소 공부도 잘 하고 명랑하고 착한 학생으로 보아왔는데 야단을 맞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가정방문을 다니는데 영자가 슬그머니 없어지고 학적부의 집 주소도 엉터리였단다. 38선을 넘어온 영자네는 번화가 뒷골목에 ‘하꼬방’을 짓고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여러 식구가 살고 있다고 듣고 있었다. 그런 비참한 모습을 담임이나 친구들에게 보이느니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겠지, 영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1956년 피난으로 시작했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원효로 2가에 방 두개짜리 전셋집에 둥지를 틀었는데 얼마 있다 비가 오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밤새 대야를 갈아대며 빗물을 받아야 했다. 집주인이 달려와서 고쳐주고 가나 며칠 후 비가 오면 도루묵이 되고, 또 고치고, 또 새고 하니 안 되겠다 싶어 이사하기로 했다. 전화위복이란 말대로 그때 비가 새지 않았으면 아마 나는 평생 아이들을 전세방에서 키웠을 것이다.
그 집 전세 돈이 50만환(화폐개혁 되기 전 당시 쓰던 화폐 단위)이었는데, 상도동 종점에서 좀 나가면 50만환에 나온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아침 상도동 가는 버스에 올랐다. 건물은 작고 허름하였으나 반듯한 뜰에 과일나무도 서 있고, 꽃과 채소밭하며 오밀조밀 알뜰하게 손본 흔적이 집주인의 마음씨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이게 다 내 집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했다. 그런데 안에서 몇 사람이 나와 신을 신고 있었다. 금방 계약이 끝났다고 하지 않는가?
그 집은 아깝게 놓치고 말았으나 나는 이제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매일 몽유병자와도 같이 복덕방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턱도 없다는 것을 통감할 뿐이었다. 체념키로 마음을 먹고 머리를 식힐 겸 김연순(남편의 6촌)을 찾아갔다. 마침 집수리를 하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자기 남편에게 말해 30만환 정도는 몇 달 빌려줄 수 있으니 결혼반지, 시계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팔아 가지고 100만환 정도의 집을 사라고 했다. 수리비 정도는 더 빌려줄 수 있으니 수리를 해서 팔면 돈은 금방 빠질 거라고 힘주어 말하던 그녀가 얼마나 우러러 보이던지…
결국 용산 한강로에 103만환에 허름한 집을 살 수가 있었다. 내 집 제1호에 퇴근을 한 남편은 한다는 소리가 “이거 3등 여관이군!”하고 나의 기를 꺾어 놓았으나 그래도 나는 좋아라 같이 웃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벽지와 천장 지를 사다 손수 도배를 했다. 미술공부를 한 덕에 공간 처리는 비싼 재료를 쓰지 않아도 그럴 듯하게 마무리가 잘 된다. 천장 도배는 사과상자를 여러 개 포개 놓고 올라서서 곡예를 했다. 젊었으니까 뭐든지 할 수가 있었다. 큰 길 쪽 판자를 떼고 차가 들어올 수 있게 대문을 낸 후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데 복덕방이 지나가다가 “아니, 뺑끼칠을 아주머니가 손수 하세요?”하며 집을 팔라고 한다.
내 집 제1호가 가볍게 처리가 되니 제2호, 제3호 계속 잘 나간 것은 나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닐 때 8조방은 필수조건이었다. 다다미를 들어내고 큰 온돌방을 만들고 뜰에 차가 들어가도록 큰 대문을 내놓으면 수리하기가 무섭게 팔렸다. 일꾼들과 노동을 함께 하는 내 고생도 어려웠지만 식구들은 이방 저방 쫓겨다니며 말이 아니었으나 다음에는 더 큰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8년이 지난 후 13번째 내 집은 의젓한 양옥이 되었고 관훈동에 화랑도 생겼다. 나는 서울을 떠날 때까지 돈을 받지 않고 화가들에게 전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집장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언제든지 친구를 불러 놀 수 있는 괜찮은 집을 마련했으니 더 늘리는 것은 과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엔 지금쯤 누가 살고 있을까? 나는 이 곳에 혼자 앉아 있는데…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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