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치과 의사’

2005-08-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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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러시아로… 찾아가 치료해주었을 때 환자들은 고통이 멈추게 된 것을 감사한다. 진료후 올리는 예배를 통하여 한 목소리로 찬양하는 기쁨이 뒤따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나를 치과에 한번 데려가기 위해서는 무진 애를 쓰셔야 했다. 귀염을 독차지하고 자란 막내아들의 고집이 여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또한 맏이를 대할 때의 단호함과는 사뭇 달라서 매사에 그래, 그래 하고 내편을 드셨다.
대여섯 살 때부터 내가 써먹은 수법은 벽에 달라붙기였는데 양쪽 팔을 쫙 벌리고 온몸을 벽에 밀착시킨 채 고집을 피우면 아무도 나를 떼어내지 못했다. 애가 탄 어머니가 왼쪽 팔을 떼어내면 오른쪽 팔을 갖다 붙이고, 오른팔을 떼어내면 왼팔을 갖다 붙였다. “사탕을 사줘, 잉잉. 그러면 갈께, 잉잉.” 결국 왕사탕 한 알을 입에 물고야 벽에서 떨어져 나왔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흔들리는 이를 실로 묶은 다음 문고리에 잡아매어 이를 뺐다. 문고리에 붙잡힌 아이에게 “얘야, 저기 좀 봐라!” 하면 아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냅다 문을 열어젖히는, 좀 치사한 방법이었다. 나는 처음 한번 이렇게 어른에게 속은 뒤에는 절대로 입을 안 벌렸다. 형과 누나들이 합세하여 협박과 회유를 해와도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치과에 관해서라면 일생 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을 했었는데 나는 어쩌다가 치과 의사가 되어 이제는 날마다 그곳으로 출근을 한다. 환자들은 진료용 유닛 체어에 올라앉아, 이것저것 묻는 나에게 호호호, 네에, 선생니임, 하고 사근사근 대답을 잘 하지만 속으로는 앞으로 펼쳐질 무시무시한 치료에 미리 겁을 집어먹고 있을 것이다.
의료용 차가운 금속기재들,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 것인지도 모르게 생긴 기구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마취용 주사기, 의사와 간호사가 자기네끼리만 알아듣게 말하는 알 수 없는 용어들…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하지 않으리라.
내가 왜 이렇게 남들이 싫어하는 과목을 택해서 의사가 되었는지, 나도 예술가가 되어서 보는 이, 듣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마음이 움직인 이들로부터 찬사를 들으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가 내가 직업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치과의사로서 의료선교에 동참하고 난 뒤의 일이다. 평생 의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해주고 난 뒤에 치과 의사라는 것은 직업이 아니고 직분임을 깨달았다.
아프리카로, 러시아로, 치아가 깨지고, 잇몸이 상하고, 신경에 염증이 생기고… 여러 가지 통증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해주었을 때에 환자들은 그 자리에서 고통이 멈추게 된 것을 감사한다. 진료가 끝난 뒤에는 함께 올리는 예배를 통하여 한 목소리로 찬양하는 기쁨이 뒤따른다. 내가 진로를 선택하여 오늘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알기도 전에 나를 택하여 이 직분을 주시며 선교사역에 쓰라고 명하셨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에디라는 2세 대학생 청년이 나의 오피스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공부하랴, 일하랴, 정신없이 바빴을 그 때에 에디는 나와 함께 나바호 부족 의료사역에 참여했다. 그리고 3년 뒤, 에디는 최우수 성적으로 풀 스칼라십을 받아 치과의사가 되는 길을 가고 있다. 그의 부모님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에디가 치과의사를 직업으로가 아니라 직분으로 받아 남을 돕는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기도해 오셨다고 한다. 더 많은 2세들이 치과의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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