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녀석! 출소하다

2005-07-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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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녀석이 출소하였다.

364일이라는 형량을 자발적으로 받고, 감옥생활을 하고 바로 엊그제 나온 것이다. 유달리 붙임성이 많고, 애교가 많아서 도저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던 그 녀석! 이 녀석은 참으로 문제 덩어리에다, 말썽꾸러기, 꾸러기였다.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 그 때도 사고를 치고 선교회 문턱을 넘어 들어왔었다. 그때 녀석의 나이가 18세였나 보다. 살을 빼겠다고 시작한 마약이 녀석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그 때문에 갱에까지 연루되어 몸도 마음도 찌들어 가고 있었었다. 어릴 적에는 봉제 공장을 하면서 정신없이 쉬지도 못하고, 피곤에 지쳐있는 엄마가 너무나 불쌍하다고, 누나와 함께 밤늦게까지 엄마가 미처 다 마치지 못한 조각난 천 조각에 끈도 끼고, 숫자도 세어 차곡차곡 쌓아놓았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엄마 차에 실어놓고 학교에 가곤 했었는데... 그 착한 녀석이 언제부터인가, 밖으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심성이 정이 많고, 싹싹한 녀석이었기에,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설마’ 라는 착각으로 엄마를 안심시키곤 했었는데 결국 경찰에 잡혔고 선교회에서 치료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몰래 약하다가 걸리기도 하고, 담을 넘어 도망도 가고, 술도 먹어 골치를 썩었었는데, 어느 정도 잠잠할 때 즈음… 녀석이 2년 전 사고를 대차게 친 것이었다. 그것도 LA가 아닌 저 북쪽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 그 마을에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지 않았지만, 자동차 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음주운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걸려서 한 달 이상을 감옥에서 살 정도인 그 마을에서 말이다. 그 곳에서 문제를 터트린 것이었다.
녀석의 사건은 그 마을 신문 일면을 커다랗게 장식했고, 재판은 신기하게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눈총사이에 몇 번이나 계속되었었다. 결국 그 마을에서는 죄 값을 1년이라는 형량을 받아 치렀지만, LA에서 보호관찰 기간에 벌어진 사실이었음을 알고, 다시 감옥소에 수감이 되어 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추방이라는 가슴 떨리는 결과를 간신히 피하기 위해 다시 또 1년에서 하루를 뺀 364일을 LA 카운티 감옥소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생활은 녀석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감옥 안에서도 충분히 마약을 할 수도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술을 마실 수도 있었지만,(참고로 감옥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다.
매일매일 선교회에서 보내주는 QT(조용히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시간)를 가졌고, 기도하면서 가능한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워낙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는 성격이어서 감옥 안에서도 친한 그룹의 유혹이 많이 있었지만,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선교회 식구들 때문이라도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았다.
그 녀석이 이제 내 눈앞에 서있는 것이다. 어느새 녀석의 나이가 24세가 되었고, 제법 철든 모습으로 의젓하게 “목사님! 이젠 다시는, 다시는 안 할꺼여요. 정말 정말 착한 아들이 될꺼여요”하는 말 속에는 전에 느낄 수 없었던 강한 의지와 진심이 담겨있었다.
이상하게도 애착이 가고 사랑이 가는 녀석! 무엇인가, 표시 낼 수 없지만, 왠지 언제나 내 가슴 속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어느 때는 가슴이 아리고, 시릴 정도로 아픔을 주었고, 어느 때에는 눈물이 핑 돌만큼 기쁨을 주는 바로 그 녀석이 이제야 내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진실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6여년 만에 말이다.
물론, 녀석이 나에게 보여준 믿음과 신뢰가 다시 깨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녀석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치신 하나님을 믿기에, 녀석에게 기대를 걸기로 했다.
“그래, 넌 할 수 있다. 넌 하나님의 아들이고, 언제나 내 아들이니까…”

한영호 <나눔선교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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