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임진강

2005-07-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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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가 덜커덩 하고 큰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미끄러지며 섰다. 머리를 돌리니 전곡(全谷)이라는 역 이름이 보인다. 젊은 역원이 메가폰을 입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모두 내리세요~”
나는 옆에 앉은 이화여전 다녔다는 분에게 “선배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막연하고 불안하기만 한데 그 분은 태연하게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전번에는 철원 역에서부터 걸었는데 오늘은 전곡까지 실어다주네. 임진강 철교가 38선이니까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거야. 무슨 수를 쓰던지 임진강을 건너야해…” 선배님은 가족을 다 서울에 데려다 놓고 정리할 것이 있어 고향에 다시 갔다오는 길이니 이번이 두번째라 했다.
“자 38선을 넘으려면 배가 고파선 안되니까 우선 뭐든지 사먹도록 합시다”하며 저쪽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짐이 없어 보이니 부탁인데, 점심 사 드릴 테니 제 짐 좀 들어주세요” 명령조로 부탁을 하고는 청년 한 사람에게도 같이 가자고 한 후 나더러 일어서라고 했다.
밥집에 들어서자 선배님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아주 중요한 얘기니까 잘들 들으세요. 정보에 의하면 요 며칠 동안 남쪽이 고향인 가족들에게 철교를 건널 수 있게 해준 대요. 우리 네 사람은 이제부터 가족이 되는 겁니다. 아저씨와 저는 부부이고 젊은이는 우리 아들, 그리고 학생은 며느리 알았어요? 38선을 넘을 때까지 우리는 가족입니다. 각자가 따로따로 저 끔찍한 임진강을 숨어서 건너려고 하기보다는 이 방법이 통하면, 아니 틀림없으리라 믿어지는 게 38선 바로 코앞까지 차로 실어다 줬잖아요? 가족 딸린 딱한 사람들 추워지기 전에 고향에 보내주자는 취지가 아닐까 짐작이 가는데…”
“그럼 소련병들에게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믿게 하나요?” 청년이 물었다.
“저에게 엉터리 증명서가 있어요. 소련병이 한문을 알 리가 없지요. 적당히 몇자 내리쓰고 큼직한 도장을 꽉 찍은 비상용 종이를 갖고 다녀요.”
할아버지는 “나는 볼품도 없고 너무 늙었는데 댁의 남편이라고 믿어줄까요?” 걱정이 앞서는 눈치인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철교가 있다는 쪽을 향해 한참 걸어가는데 철길 양쪽에 가족 단위로 보이는 군중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저 멀리 앞쪽을 내다보니 높은 기둥에 백열등이 켜있고 그 저쪽에는 시커먼 철교가 아스라이 보인다.
네 사람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져가고, 우리 차례는 오지 않고… 앞쪽에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면서 “오늘은 그만 한 대요. 어두워지면 위험하니까”라고 했다. 선배님은 우리 세 사람을 몰고 다시 밥집으로 갔다.
밤중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좁은 방안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있으니 잠은 오는데 잘 수는 없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사람들이 안내원을 기다리는 눈치이고 밥집 주인이 서있었다. 나는 안내원하고 임진강을 건너면 이 밤 안으로 남쪽으로 갈텐데…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38선 넘겨주는데 얼마 받는데요?” 물어보니 “여자는 안 됩니다. 험한 산을 넘어야 하고 임진강 물은 얼마나 센데” “저 여자분도 안내원 기다리나 본데요” 했더니 “그 여자는요, 남편이 가니까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저러고 있다구요”
다음날 아침 새벽같이 철길로 나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가 일어서서 종이를 펼쳐 보이고 소련병은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를 끄덕끄덕하고 손을 들면 한 무리가 철교 쪽으로 빠져나간다. 선배님의 정보는 확실하였다.
침목 위에 깔린 판자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고향을 영영 버리는 거다!” 어쩌면 그렇게도 가느다란 판자는 끝을 모르고 멀게 멀게 뻗어 있는지? 한발 삐꺽하면 흔적도 없이 임진강 물귀신이 될 판인데, 금방 누가 쫓아와서 뒷덜미를 덮칠 것만 같아 앞만 보고 죽어라 뛰었다. 목구멍에서 쇳내가 나도록… 천길 임진강물은 요동을 치며 시커멓게 흐르고, 서커스의 외줄 타기 같은 곡예가 끝났다.
와! 남쪽 땅이다! 1945년 10월21일 아침, 마의 38선을 나는 이렇게 넘었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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