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전여전

2005-07-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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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정 어머니는 밥먹고 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사람노릇하며 사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럴 때의 어머니의 모습은 참 쓸쓸하지 않았나 싶다.
친가나 외가 모두 이북에서 월남하셔서 거개가 고만고만한 살림으로 다들 어려웠다고 하는데, 바지런하시고 머리가 영리하셨던 남편을 둔 덕분에 어머니는 밥먹고 사는건, 그래도 다른 일가 친척들보다는 수월하셨다고 한다. 친척들 나름대로 연장자 순으로 서열이 있긴 했었겠으나 암튼 내 어릴적 기억으로는 늘 우리집이 중심이 되어 일가 대소사를 치르었던 것 같다.
고모님네 누가누가 결혼을 하고 외삼촌댁 누가누가 새 장사를 시작하더라도 바로 아버지를 찾아오셨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오셔서 어두운 표정으로 뭐라뭐라 혼잣말을 하시곤 했다. 이북사투리인지 아니면 우리 집안 내에서만 쓰는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암튼 혼자 궁시렁거리는 것을 우리 집에서는 ‘북북거린다’라고 표현했는데 그 북북거린다 속에는 부아가 치밀고 분은 나는데 대놓고 누구한테 표현은 못하고 혼자서 화를 삭이느라 씩씩거릴 때 쓰는 말이었다.
내 기억으로도 나는 우리 어머니가 부엌에서 북북거리시는 것을 여러번 봤던 것 같다. 그럴 때는 알아서 방 청소도 하고 조용히 숙제를 하는 등 어머니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언니와 나는 무척 조심을 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애매한 불똥이 우리한테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땐 그렇게 어머니가 북북거리실 때마다 눈치껏 알아서 기기만 하다가 조금 더 커서는 도대체 어머니는 왜 저러실까, 참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척집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고종사촌 언니오빠를 결혼시키고 이종사촌 가게 여는걸 전적으로 책임질 형편은 못되는데 내 아버지는 늘 힘껏 그들을 도와주니까 어머니는 그게 크게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어머니 슬하에 있는 우리 형제만 해도 여섯이니까 어머니 나름대로 계획과 궁리가 있으셨을텐데 그게 번번이 다른 친척들 돕느라 무산됐으니 속도 상하셨을 것이다.
암튼 아버지한테 그렇게 못하시도록 단도리를 하시면 그만일텐데 어머니는 줄 것 다 주고 늘 뒤에서 영양가 없이 북북거리시기만 하셨다.
머리가 커져서 어머니 말씀에 한창 버르장머리없이 댓거리를 하던 무렵 나는 따지듯이 물었었다. 어찌 그리 똑똑하지 못하냐구, 마음에 없으면 주지를 말고, 일단 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내라구,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것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 하는 일인 줄 아느냐구…
어머니보다 많이 배운 내가 배운 티를 내느라 기억 속을 헤집으며 요것저것 예를 들어가며 여봐란듯이 어머니를 몰아세웠었다. 이제 어머니는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실 수밖에 없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조목조목 따졌는데 어떻게 무슨 변명을 하실 수 있겠는가. 확실한 증거를 쥔 수사관처럼 나는 의기양양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 깜짝할 사이 없이,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어머니는 사납게 내 등판을 후려치더니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살아봐라. 어디 너도 한번 살아봐라. 네 말처럼 되는지. 나라고 북북거리는 게 좋아서 이러는지”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산뜻하고 명쾌하게 인생을 살겠다던 그 잘난 체 하던 딸은 요즈음 저도 모르게 부지불식간 놀라곤 한다. 운전을 하면서, 설겆이를 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너무나도 자주 북북거리는 저 자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 쓸것 안 쓰고 주었건만 어찌 그리도 은혜를 모르는가, 마음은 또 얼마나 썼는가, 내 몸 움직여서 도운 건 또 얼마야…” 북북거리는 내용이 다양하기도 하다.
마음그릇은 간장종지 크기인데 사람노릇하고 살려니 힘이 들어 혼자 궁시렁거리는 것이다. 눈 딱 감고 모른 체 지나칠 수도 없고 까치발 세우며 애썼는데도 그 공을 몰라주니 섭섭하고, 그렇다고 누굴 붙잡고 하소연 할 수도 없고.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내 안에 어머니 모습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한 말씀 하실 것 같다. “살아보니 이제 너도 알겠지? 사람노릇하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영화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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