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헤어지지 마’

2005-06-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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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가 싱글일 적엔 서로 좋아하다가 결혼한 다음에 안 좋아하게 되면 이혼하는 것이겠지? 다른 선택은 없나?
있어, 맨날 맨날 싸우는 거야
그렇구나. 우린 학교에서 한 애가 쏘리 하면 또 딴 애는 잇츠 오케이 하고 다시 노는데 왜 어른들은 그거 안할까?


우리 집에 온 포스터 아동은 아홉 살 남자아이다. 아이가 들고 온 조그만 가방에는 낡은 티셔츠와 작아진 반바지 하나, 그리고 고장 난 장난감 나부랭이가 들어 있었다. 얼마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던 아이가 우리 식구 중에 그래도 가장 먼저 마음을 붙인 사람은 동갑짜리 나의 막내아들이다. 아이는 나의 막내와 한 방에서 이층 침대를 나누어 쓴다. 이층에 누운 아이가 잠들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리다 보면 아래 누운 나의 아들아이 역시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이런저런 궁리가 많아진 모양이다.
우리는 두 아이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윗층 침대를 아래로 내려 두 개를 나란히 배열해 주었다. 엊그제는 침대 맡에 앉아 책을 읽어주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두런두런 하는 소리에 언뜻눈을 떠보니 아이 둘이 얘기를 하고 있다.
너는 학교 가는 거 재미있니? 아이가 먼저 막내에게 묻는다. 그저 그래. 어떤 날은 재밌고 어떤 날은 재미없어. 넌? / 나는 학교 가기 싫어. 우리 아빠가 감옥간 거 아이들이 다 아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날 놀리니까 학교 가는 게 싫어 / 아빠가 왜 감옥 계시니? / 어떤 사람에게 총을 쏘았대. 몰라, 신문에도 나고 맨날 뉴스에도 나오구 그랬어. 그런데 우리 아빤 나쁜 사람 아니다. 난 알어. 그 사람이 먼저 우리 아빠를 때리니까 아빠가 화나가지구 총을 쏘았다고 아파트 사람들이 말했어 / 아이들이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저 계속 눈을 감고 있다.
아빠 보고 싶니? / 응 / 그러면 넌 왜 엄마랑 살지 않니? / 내가 너한테만 얘기해 줄게, 비밀 지킨다고 약속해 / 약속한다. 남자 대 남자로! 두 아이는 서로 주먹을 맞부딪친 다음 두 팔을 엇갈려 맹세까지 했다. 내 엄마 아빠는 이혼했대. 아빠가 돈을 못 버니까 엄마가 도망갔어 / 어디로? / 나두 몰라 / 너, 엄마 찾아 삼만리 책 안 읽어봤니? 거기 나오는 애처럼 너두 엄마 보구 싶으면 엄마 찾으러 갈 수 있잖아 / (침묵)
아이가 잠들었나 하고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너네 엄마 어디로 가셨는지 찾아보구 싶으면 내가 너랑 함께 가줄까? / 아니야… 우리 엄마는 그 엄마랑 다르잖어 / 뭐가 달러? / 이야기책 속에 그 엄마는 돈 벌러 간거지만 우리 엄만 내가 미워서 간거잖아 / 나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비밀을 나눈다고 하는 장면에 갑자기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아이가 살그머니 일어나 머리맡의 창문 블라인드를 열면서 말했다. 난 이제 엄마를 다신 못 볼거야. 내가 눈물 흘리는 건 엄마가 나한테 잘 해주셨던 거 생각나서 그런 거야. 이혼하는 건 참 나쁘다 / 그래, 엄마 아빠가 싱글일 적엔 서로 좋아하다가 결혼한 다음에 안 좋아하게 되면 이혼하는 것이겠지? 다른 초이스(선택)는 없나? / 있어, 맨날 맨날 싸우는 거야 / 그렇구나. 우린 학교에서 한 애가 쏘리(Sorry)하면 또 딴 애는 잇츠 오케이(It’s O.K.) 하고 다시 노는데 왜 어른들은 그거 안할까? / 조금 후, 막내가 하품을 하자 아이도 따라 하품을 했다. 두 아이는 곧 숨소리 고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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