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과 관계 이야기 부모의 별거

2005-06-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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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초반의 박씨는 80세 생일잔치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가 있다. 온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일본유학까지 하셨고 고등교육을 받으셨다. 덕분에 오랫동안 고위층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온 가족이 한국에서는 만족스럽게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박씨가 자랄 때 아버지의 옆에는 엄마 외에 다른 여자가 늘 끊이지 않았었다. 귀가한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어쩌다 일찍 집에 들어오신 날이면,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머니를 자식과 손님들 앞에서 멍텅구리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천대하기가 일쑤였다. 그 당시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대항도 없었다. 어머니는 오로지 3남매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고 다 보냈다고 늘상 불평하신다.
아버지 정년퇴직이후 오빠의 초청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국에 오셨다. 한동안 오빠 집에서 함께 지내시다가 신청해 두었던 노인 아파트에 입주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입주하기를 거부하셨다. 아버지와의 별거선언을 하신 것이다. 의외이긴 했지만 아버지의 언어폭력과 정서적인 폭력의 정도가 자식들 보기에도 심했기에 어머니의 별거선언을 도와 드렸다.
별거선언을 즈음해서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나 반항이 없는 순종적인 아내이기를 또한 거부하셨다. 아버지의 무시와 천대에 대해 두 분이 만나기만 하면 맞싸움을 하신다. 아버지의 외도와 술 중독으로 인해 어머니 자신의 80년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억울하게 지나간 것을 몹시 애통해 하신다. 최근에는 신경정신과에서 항우울제를 처방 받아서 복용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도 또한 아버지대로 지난날의 영화와 풍요,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 등을 그리워하시며 늘 화가 난 상태이다. 언어 소통도 안되고, 운전도 못하는 현재의 미국생활이 나이 80인 당신을 자꾸만 초라하게만 만든다고 미국에 온 것을 거듭 후회하신다.
오빠는 만나면 싸우는 부모가 싫고 늘상 고함지르는 아버지와 우울증에다 자신의 신세 한탄을 그치지 않는 어머니가 싫다며 좀처럼 왕래가 없다. 박씨는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따로 따로 들러서 식사, 청소, 시장보기 등을 돌보아 드린다. 나 몰라라 하는 오빠에게 화가 나고, 무기력한 엄마도 밉지만, 아직도 걸핏하면 고함지르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무척 심각하다.
오늘도 몸으로는 자식의 도리를 행하면서도 마음은 늘 갈등, 짜증,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언제쯤 되어야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신이 진정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다.

이 은 희 <결혼가족상담전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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