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Hola! amigo

2005-06-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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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중남미 독립과 아메리카 제국

제321회. 아메리카제국 43. 월남전쟁 2

월남전 참전 명분이 생긴 미국은 옳다구나 하고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통킹만 사건 2년만인 1966년의 월남파병 미군은 50만명에 가까운 48만명에 육박하였다. 2차대전 이후 최대의 병력을 집결시킨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국군의 작전지역을 17도선 이남으로 제한하였다. 거기를 넘었다가는 한국전에서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단추는 잘못 끼워진 것이다. 이렇게 작전을 제한해 놓으니 지휘관들이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베트콩은 일정한 전선이나 전투장이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고, 주월 미군은 엄격한 본국의 제한작전 명령 때문에 그들을 소탕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은 그냥 지루한 소모전으로 치달았고, 게릴라전 같은 것을 별로 해본 경험이 없는 미군에게 이 전쟁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소모전 전쟁의 돌파구를 찾던 월맹의 국방상 보구엔지압은 미군에 대한 군사적 승리는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1968년 설날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베트콩들을 도시 지역에 투입하여 행정관서, 방송국 등을 장악하도록 한 후 민중봉기를 유발하는 작전을 세웠다.
1년 중 베트남의 제일 큰 명절인 설날에 월남은 대대적인 축제를 가질 계획을 세웠고, 월맹도 일주일간 설 휴전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물론 위장작전으로. 설 전날이던 1월29일 우리나 마찬가지로 베트남인들도 귀향객으로 온 나라가 법석이었다. 그 많은 군중에 대한 검문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월남의 검문소를 뚫고 수많은 베트콩들이 도시로 잠입하였다. 무기와 탄약은 장례식의 관 속에 넣어 운반하거나 또는 야채 수송차량을 통하여 반입되었다. 다음 날 설날이 되자 베트콩들은 해안 도시 나트랑에서 먼저 공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수도인 사이공에서도 베트콩들의 공격이 시작되어 미국 대사관을 필두로 하여 월남 관공서와 정부 주요 시설물들이 피습 당했다. 민중봉기를 기대하며 거의 1개월간에 걸쳐 계속된 베트콩의 설날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미국인들의 반전 심리를 크게 부추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월맹측은 설날 공세로 3만5,000명의 베트콩이 사살되고 6,000명 정도가 생포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미국의 반전 여론이 비등하였고, 또 부패하고 취약한 정권을 더 이상 보호해야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미 정부의 철군 결정으로 1973년 월남을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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