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월에 간 사람

2005-06-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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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대학 3학년 때 3·1절 날이었습니다. 음악과 친구 상순이가 육군 관사에 사는 남자친구에게 놀러 가는데 저더라 같이 가자면서 영문과 연순이도 올 거라고 했습니다. 삼각지 정류장에서 전차를 내리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연순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곁에 선 군복 입은 청년을 가리키며 “우리 6촌 오빠야. 육군 관사에 들어가려면 보초가 서 있을 테니 도움이 될 것 같아 함께 왔어. 이쪽은 나랑 동고녀 같이 나온 미술과 친구”
이렇게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녀의 짐작대로 관사입구 오른쪽에 섰던 보초병이 ‘꽥’ 소리를 지르며 부동자세로 김중위에게 경례를 부치고 그도 절도 있게 손을 올려 답례를 하더군요. 건장하고 상쾌한 인상의 김 중위가 앞장을 서고 두 여대생은 졸졸 따라 들어갔습니다.
두 번째 만남은 1년쯤 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었지요. 그 무렵 저는 가족이 있는 화가의 성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부인과 헤어질 테니 졸업하면 같이 외국에 나가 세계적인 작가가 돼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더라 첩이 되라는 말이 아닌가?”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소실 문제로 늘 눈물로 지새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가 아무리 달콤한 말로 다가와도 혐오감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충무로 길을 가다 그 화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크 큰일났다!” 화가는 따라오면서 횡설수설 계속 말을 걸고 저는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앞쪽으로부터 인파를 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장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대위 계급장을 단 김 중위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급하게 “김 중위님 저 아이스크림 사주시겠어요?”하고 말을 걸었지요. 그는 반가운 얼굴로 “그렇게 합시다” 대답하며 마침 바로 길옆의 후줄그레한 빨간 천을 드리운 아이스크림 집으로 들어가더군요. “아! 살았다” 힐긋 돌아보니 화가는 망연자실하여 길 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집을 나선 우리는 충무로 길을 나란히 걸으며 할 이야기라곤 없었습니다. 1년 전에 한번 만났을 뿐인데 느닷없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랐으나 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고, 김 대위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입을 다문 채 힐끔힐끔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집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다음 일요일 “영락교회를 다니겠다”며 나타난 김 대위를 어머니는 반기시는 눈치였습니다. 교회로 간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지요.
졸업을 앞두고 김옥길 사감(후의 이대 총장)님이 부르시더군요. 선생님은 미국 유학을 떠나실 참이었는데 “내가 떠난 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학 갈 준비를 하라고요” 그 당시(1949년) 미국 유학은 젊은 사람들의 꿈이었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면 돈은 한푼도 들지 않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제 몇 일 후면 학사 과정을 공짜로 마치고 거기에 미국 유학까지 보장된 셈이니 저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라 할 수 있는데, 어머니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겁니다. 해방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고 고생이 말이 아니었거든요. 학교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유학을 갔다와서 학교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길인데 말입니다.
졸업을 하자 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김 대위는 주일마다 나타나서 함께 영락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느 날 이웃 아낙네들이 ‘사윗감인가보다’ 면서 수군댄다는 말이 들려오더군요. 저는 어머니 생활이 안정이 되면 슬슬 유학 갈 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마침 여학교 후배로 늘씬한 미인이 평택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그녀에게 편지를 썼지요. “여기 집안 좋고 진실한 성격의 정직하고 기억력 좋고 뭐든지 잘하고 재미도 있는 북경성보고 출신 육군 대위가 있는데 만나 보겠느냐?”고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좀 과장된 점이 없지 않으나 우리 지방에서는 북경성보고라 하면 무조건 알아 줬으니까 후배가 평택에서 올라 왔었습니다. 두 사람을 앉혀놓고 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흐뭇했지요.
그녀가 떠난 후 김 대위가 마음에 없다고 했을 때 저는 거의 이성을 잃었습니다. “천하의 동고녀 출신을 마다하는가? 그만한 미인을 어디 가서 구할라고!” 김 대위는 저를 건너다보며 “천하의 동고녀 출신은 여기도 있지 않냐?”했습니다. 그의 엉뚱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아니지. 얼굴도 이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유학을 가야 하니까”
“얼굴은 그만하면 됐어. 충분히 귀엽다. 유학을 가라구. 기다릴게…”
그랬던 그가 5년전 6월 어느 날, 미소를 지으며 먼저 떠났습니다. 먼 나라로.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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