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노랑 우산

2005-05-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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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층에 온 후 다운타운 쪽 창가에 서서 한참씩 밖을 내다보며 혼자 시물시물 웃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넓은 하늘에 삐죽삐죽 솟은 빌딩 숲은 제멋대로 세운 것 같으나 그런대로 균형이 잘 잡힌 듯도 하여 마음이 놓인다. 이곳에 살아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공연히 웃고 싶어지나 보다.
새벽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이제는 제법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데 창가에 서니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저 밑의 보도 위로 노~란 우산이 걸어가고 있다. 그래 참, 그때도 노랑우산이었지…
1946년 그날 아침에도 을지로 2가 뒷골목에 비가 내리고 노란 색 우산이 현관 앞에 머물러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그 집은 38선을 넘어온 여대생 10여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비가 와도 우산 따위 사치품을 지닌 학생은 한 명도 없을 터인데 어찌된 일일까? 골목 안을 환하게 비춘 노랑우산을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본 나는 깜짝 놀라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서양화과 친구인 정귀순이다. 그녀가 왜 이런 곳에 나를 찾아왔을까? 비가 오는데. 어둠침침하고 꾀죄죄한 고학생 소굴에서 나를 확인한 그녀는 몹시 반가워하며 학교에 가자고 했었지…
나는 그 전날 미술과 과장인 심형구 선생님 책상 위에 ‘휴학계’라고 쓴 종이 한 장을 놓고는 “이제 학교 하고는 끝이다. 친구들을 다시 볼일도 없겠지” 혼자 단단히 마음먹고 돌아섰는데, 그리고 오늘부터 나갈 일자리도 이미 정해놨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를 찾아오다니…
“과장 선생님이 학교에 나오래. 나더러 아침에 들러 꼭 데리고 오랬어”
나는 “학교에는 못 가게 됐다”고 잘라 말하고 그녀를 돌려보낸 후 새 일터로 떠났다. 비를 맞으며 광화문 근처까지 와서 두리번두리번 하다 제법 번듯하게 써붙인 ‘국립과학연구소‘라는 간판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미술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과학연구소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마는 모처럼 청구동 최선생님이 힘써주신 직장을 나는 딱 하루 나가고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정귀순이 또 왔기 때문이다.
“과장 선생님이 오늘은 꼭 나와야 한대. 아주 좋은 얘기니까 안 나오면 안 된다고 하셨어”
그녀는 망설이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전차 정류장까지 나왔다. 억지로 등을 밀어 전차에 태우고는 만족한 듯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참 좋은 친구다. 잘 정돈이 된 이목구비에 양쪽으로 땋아 내린 갈래머리가 잘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에 진솔한 태도, 거기에 데상 실력이 대단한 학생이었다.
과장실에 들어가니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도교수와 상의도 없이 빈방에 휴학계 한 장 던져놓고 사라지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 학생의 처지를 짐작할 수는 있어. 나도 우에노(동경미술학교) 다닐 때 신문배달, 우유배달 닥치는 대로 일하며 겨우 5전짜리 우동 한 그릇 사먹고 하루 종일 물만 마시며 데상에 몰두했었지.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어. 미술이란 살을 깎는 아픔을 참아낼 수 있는 자만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이야. 장난이 아니지. 그건 그렇고 아주 좋은 얘기가 있어요”
과장님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총장님(김활란 박사) 앞으로 이대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는 신청이 들어와서 인선 중이었는데 오늘 결과가 나왔으니 짐을 챙겨 기숙사로 들어가란다.
아니,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갑자기 눈앞에 환히 트이며 내 몸이 하늘 높이 둥둥 떠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기쁠 데가!
“그래, 내게 이런 기회를 주신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자” 그때 다짐했었는데 아직도 그렇게는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후 60년을 계속했는데도…
비는 어느 새 멎고 노~란 우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는 새삼스레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열심히 그려야지” 다짐해본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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