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05-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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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과·머슴과

지난 주 궁상을 좀 떨다가 얼굴 피부에 심각한 손상이 있었다.
쓰던 화장품이 다 떨어졌는데 사러갈 시간은 나질 않고, 갑자기 알뜰한 마음이 되면서 ‘자질구레한 샘플 다 처리한 후 새로 사자’ 뭐 이런 생각에 샘플 몇 가지를 바른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에스티 로더라 괜찮으려니 했는데 양쪽 뺨으로부터 작은 발진 같은 것이 돋아나더니 얼굴 전체가 불긋불긋해지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후회하였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백화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 속상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동료가 내게 불쌍한 듯, 그러나 약간은 부러운 듯 야릇한 시선을 보내면서 자기 피부는 ‘식모 피부’라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식모 피부가 뭔데?”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면서 주인아줌마 화장품 아무거나 훔쳐 발라도 전혀 이상 없는 피부를 말하죠” 우리는 다같이 뒤집어졌다.
피부도 이렇듯 건성, 지성, 중성, 복합성, 민감성, 식모성으로 나뉘는데 하물며 인간이랴. 얼마전 친구들과 ‘가사노동에서의 남편의 기여도’에 관하여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집안 일을 혼자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증세를 들은 한 친구가 나를 ‘머슴과’라고 진단해주었다.
그 친구에 따르면 여자는 크게 보아 ‘공주과’와 ‘머슴과’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공주과는 주로 남자형제가 많은 집의 외딸이거나 무남독녀로 자란 여자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유형이고, 머슴과는 여자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매들끼리 치여 자란 여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명칭에서부터 감이 잡히겠지만 공주과란 ‘내숭파’와도 일맥상통하는 유형으로, 남자 앞에서 연약하고 얌전해지는 부뚜막 고양이 비슷한 스타일이다. 이런 여자들은 늘 약하기 때문에 일도 많이 안 하면서 남편에게 대접은 대접대로 잘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 머슴형이란 남자건 여자건 누구 앞에서도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고, 남에게 일을 시키기보다 자기가 다 해야하는 인간을 말한다. 힘이 별나게 센 것도 아니면서 웬만한 집안 일은 알아서 처리하고, 혼자 가구를 들었다 놨다, 못과 망치도 수시로 두들기며, 웬만큼 아파서는 아프다 소리도 안 하는 유형이다.
한 예로 우리 집은 마켓보고 집에 올 때마다 작은 싸움이 일어나는데 수많은 마켓봉지를 누가 더 많이 들고 옮기느냐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처음에 남편은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힘이 몇 배나 센데, 여자인 아내가 무거운 짐을 더 많이 들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아들도 내가 무거운 걸 드는 모습을 보면 빼앗으면서 야단을 치고 혀를 차는데 그 때마다 남편 하는 말, “놔둬라.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제일 힘세단다. 너도 이담에 엄마 같은 와이프 만나서 나처럼 편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어떤 여자가 공주형이고 어떤 여자가 머슴형일까? 재미있는 사실은 외모로만 보아서는 절대 가려낼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외모로는 공주과에 속하지만 대표적인 머슴형인 반면, 겉보기에 투박하고 씩씩한 여자 중에도 공주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처녀총각 시절엔 어떤 형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나도 처녀 시절엔 공주 중의 왕 공주였다. 그때 공주가 아니라 머슴이었다면 어떤 남자가 나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결혼하여 가사일을 직접 해야할 상황에 직면하면서부터 머슴과의 성질이 유감없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공주와 머슴을 가리기 쉬운 방법 하나, 추워서 떨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겉옷을 벗어주었을 때의 반응을 보면 된다. 벗어준 옷을 다소곳이 걸치는 여자는 공주과, 싫다고 한사코 마다하는 여자는 머슴과라고 보면 된다. 나는 병적으로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남자가 옷을 벗어주면 아주 딱 질색을 한다. 속에서 치사스런 생각이 불끈 올라오면서 ‘내가 추운데 왜 지가 옷을 벗어’ 이러거나, 산 같은데 오를 때 남자가 손이라도 잡아주려 하면 ‘내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이런 생각부터 드니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이 머슴형 여자는 참으로 한심하고 미련하며 바보같은 유형이다. 남자들이 여자에게서 머슴을 원하겠는가, 공주를 원하겠는가? 자기 몸만 피곤하고 대접은 대접대로 못 받는데다 더 불쌍한 것은 본인이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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