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하는 우리 가족

2005-05-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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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날 선물

엄마랑 아이들이 동네에 있는 마켓에 갔다. 5학년인 큰 녀석이 슬며시 엄마에게 와서는 물었단다. “엄마, 나 2불만 주면 안돼?” 우리는 아직 아이들에게 돈을 줘 본적이 없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엄마에게 부탁하면 되는데, 그 날은 무슨 속셈인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엄마는 아이가 왜 돈이 필요하게 되었는지 다 안다. 어머니날이 다가오면서 엄마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아이들이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설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하고 벌은 돈도 있고, 지난 번 삼촌 할아버지가 오셨다가 착하다고 주신 돈도 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한번 예금하고 나면 웬만해서는 되찾기가 어려운 엄마은행(?)에 맡겼기 때문에 그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래서 모처럼 돈 쓸 일이 생겼지만, 엄마에게 사정을 해야만 하게된 것이다.
엄마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하는 너무나 생뚱 맞은 상황이지만, 그 아이들을 보면서 엄마는 너무나 행복했다. 아빠에게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선물이 꽤나 기대가 되었는가 보다. 기껏 해야 2불짜리 선물일 텐데, 그 선물은 엄마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기에는 넉넉한 선물이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머니날이 되면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큰맘 먹고 종로 1가 네거리에 있던 신신 백화점에 들러서 엄마를 위하여 해마다 뿌롯찌를 샀던 기억이 난다.(영어로는 brooch인데, 왜 우리는 그걸 뿌롯찌라고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 자체가 그 때 내겐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서 며칠씩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온 백화점을 돌고 돌아보지만, 결국 뿌듯함을 안고 소중히 싸 들고 오는 것은 백화점 입구에서 산 뿌롯찌였다. 그 선물을 드리고는 얼마나 효자 노릇한 것 같이 생색을 내었던지.
요즘엔 흔한 일이 아니지만, 그 때는 어머니들이 한복을 입으면 긴 옷 고름을 매는 대신에 보석으로 꾸며진 뿌롯찌를 달았다. 뿌롯찌를 사면서도, 그것이 어머니의 한복과 색이 맞는지,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그런 것은 내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 생각에 그 좌판에 널려 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비싸 보이는 것이면 되었다.
내가 사드린 뿌롯찌를 엄마가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어머니날이 지난 첫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달고 가셨다. 누가 보아도 철딱서니 없는 중학생 아들이 사준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있는 그 뿌롯찌를 온 교인들이 보란 듯이 달고 다니셨다. 어머니 날, 어머니 기뻐하시라고 드린 선물이었지만, 어머니 당신이 좋아서 그 선물을 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들 좋으라고 단 것이다.
어찌 보면 도무지 경우가 아니다. 선물이라는 것이야 원래 주는 사람이 정성을 담아서 구입하고, 받는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돈도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얻어서,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유익한지 아닌지 조차도 상관없이 마련된 선물을 주면서 온갖 생색을 내는데, 받은 사람은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우리 어머니들의 얘기다.
한국의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분들은 희생을 통한 진정한 삶의 성취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그토록 부흥과 성장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교회 안에 여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던 어떤 목사님의 말씀은 과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들은 희생과 헌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었고, 그 분들의 삶에 배인 희생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거름이 되었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이번 어머니날에 나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줄 작은 장미꽃을 샀다. 어머니날에 어머니를 위해 꽃을 사면되었지, 왜 아내에게 꽃을 사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미국에 어려서 와서 자란 아내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의 대열에 서있는 아내를 향해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동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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