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05-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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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되다

지난주의 어느 날 아침 편집회의 때였다. 어머니날이 다가왔으니 아버지들이 받는 스트레스에 관해서도 기사 한 꼭지 쓰자는 의견이 나왔다.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어릴 경우 남편들은 부모님도 챙겨야하고 아내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몹시 고달프다는 이야기였다.(참고로 우리 편집국 부장들은 모두 남자다) 그때 나는 너무 놀라서 거의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어머, 나도 어머닌데, 그동안 나는 어머니가 아니었나봐!”
다들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해마다 어머니날이 되면 시어머님을 위한 선물과 저녁식사 준비에만 신경 썼지, 어머니날이 나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남편과 아들이 나를 위해 밥을 해준다던가, 저녁을 사준다던가, 근사하게 대접받기는커녕 제대로 된 선물조차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충격고백에 모두들 놀라서 한마디씩 했다.
“그런건 남편이 알아서 해야하는데…” “어머니날 밥을 하다니, 해도 너무 했다” “너무 잘해줘서 스포일 된거야” “지금이라도 남편에게 언질을 주고 시켜야 아들이 배우지”
내가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갈수록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밥을 한다고 해도 말렸어야지, 무슨 특별식 먹는 날로 알고 신나서 기다리고 있다니, 어디 두고 보자.
기왕 하기로 한 저녁이었으므로 일단은 조용히 준비하기로 하였다. 토요일 아침 코스코를 향하는 남편의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날 메뉴로 자기네가 좋아하는 서양식 애피타이저(카프레제-토마토, 모자렐라치즈, 베이즐 잎을 함께 묶은 것)에 한식 메뉴인 콩나물무국과 연어, 새우, 버섯요리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콧노래마저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코스코와 플라자마켓, 트레이더스 조 등 세군데 장을 봐야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음식준비를 시작했다. 연어와 새우는 밑손질을 해놓아야 교회 다녀와서 요리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연어는 일인분씩 크게 토막내어 양념(올리브오일, 다진 마늘, 레몬즙, 소금 후추, 말린 베이즐 섞은 것)에 재우고, 새우는 큰 것을 손질해 소금 후추 살짝 뿌린 다음 둘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올리브오일에 재운 연어는 나중에 큰 팬이나 웍에 넣고 중약불에 10분 정도 익히면 너무나 부드럽고 맛있는 일류식당 메뉴가 되고, 왕새우는 웍에 오일을 두르고 볶은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뚜껑 덮고 10분정도 익힌 다음 굴소스와 핫소스를 뿌려 고루 섞어내면 짭짤 매콤한 인기만점 요리가 된다. 이런 제반의 준비를 마친 다음, 늦게 일어나 어슬렁거리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나는 어머니 아니야?”
남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냐구우~. 나도 어머닌데 왜 내가 어머니날 밥을 해야돼? 어머니날 아침부터 어부인이 끓여준 수프에 토스트까지 앉아서 받아먹는 간 큰 남편은 아마 당신밖에 없을거야”
그제서야 감을 잡은 남편이 당황하여 설설 기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야, 오늘 아침엔 원겸이 하고 뭘 좀 해서 당신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일어났네…”
아들도 얼른 카드와 선물을 갖고 달려왔다. 카드에는 생일과 크리스마스, 마더스 데이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쓰는 말, “엄마 매우 사랑해요. 엄마는 이 우주에서 최고의 엄마예요.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할께요.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기뻐요”에 해당되는 글이 영어로 쓰여있고, 20달러가 들어있었다. 선물은 엄마와 자녀의 관계를 재미있는 동물사진들로 풍자한 ‘디어 맘’(Dear Mom Thank You for Everything)이란 사진책이었다.
카드와 책을 고르고 사기 위해 아빠가 데리고 다녔을테고, 선물이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는데다, 용돈을 모아 캐시 20달러를 넣은 아들이 기특해서 나는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만에 오신 어머님, 식사하시면서 내 편을 들어 한 말씀 하신다.
“내년부터는 숙희 일 시키지 말고 나가 사먹자”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제야 저도 어머니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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