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어머니의 틀니

2005-05-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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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아지니 가끔 나 사는 아파트 동수도 가물가물 할 때가 있고…”
또다시 가슴에 철썩하고 파도 같은 게 지나간다. 그 전화로 외로운 어머니께 전화가 자주 걸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머니는 서울에서 혼자 사신다. 덩그마니 커다란 아파트에 일 도와주는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하루 종일 혼자 지내신다.
어머니는 올해 여든여덟이 되셨다. 80 되시던 해에는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이 제주도로 나가서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다섯 자녀를 한자리에 모으기는 30년만의 일이라며 어머니는 웃으시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하셨다.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3일. 각자의 자리로 다시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는 자식들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오셨던 어머니는 “내 걱정 말라우. 다들 바쁜데…”하고 말씀하셨다.
“내년엔 어머님이 미국으로 나오세요.”자식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는,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그 후로 한번도 미국에 다녀가지 못하셨다. 팔순 이후로 어머니는 나이를 세지 않으신다. 누가 나이를 물을라치면 “하나님께 갈 날이 가까왔수다.”하고 대답하신다.
어머니는 아침나절을 피아노를 치며 보내신다. 다섯 살 때부터 치던 피아노가 어머니의 유일한 낙이다. “무슨 곡을 치고 계셨어요?”하고 안부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는 “에미 목소리 한번 들어볼란?”하고는 전화기에 대고 노래를 부르신다.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찬송가 460장’
목소리는 기운이 없어 떨리고 높은 음정은 흔들려도 어머니의 고운 목소리만은 그대로다. 예배 시간에 내가 불렀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부르시는 가사를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온다.
한번은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내 전화번호 좀 받아 적어보라우” 어머니에게 새로운 셀룰러 폰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셀폰으루 누가 전화를 하우?” 빙글대며 묻는 내게 어머니는 대답하셨다.
“나이가 많아지니 가끔 나 사는 아파트 동수도 가물가물 할 때가 있고 ......”
또다시 가슴에 철썩하고 파도 같은게 지나간다. 그 전화로 외로운 어머니께 전화가 자주 걸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전화가 안 와야 아무 일 없는 것이겠지…하는 생각도 한다.
아무리 졸라대듯 여쭈워봐도 생전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하시는 어머니가 미국 사는 아들에게 부탁하는 유일한 물건이 전화기다. 처음엔 무슨 전화기가 그리 자주 고장이 난단 말인가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머니의 청력 때문이다.
“뭐라는 소리냐? 안 들려 ... 좀 크게 말하라우!”어머니는 자꾸 전화기를 탓하신다. “네, 어머니! 새로 보내드릴께요. 요즘 아주 잘 들리는 신제품이 나왔대요.”
어머니께 사드릴 수 있는 물건이 있다는 게 기뻐서 나는 청각장애자용으로 개발된 신제품이 없나 하고 살펴본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라도 사드릴 만큼 나는 어른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이제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 하신다.
“어머니!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백내장 수술은 잘 됐어? 다리 아프신건 좀 어때요?”오늘 아침에 전화를 드리니 어머니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눈이랑 귀랑 다 그러려니 하갔는데, 요즘 들어서 이가 많이 아파. 틀니도 닳아서 헐거운지 자꾸 빠지구 ......”
내가 20년 넘게 미국에서 치과의사를 하면서 만들어 끼워드린 틀니 환자만도 수 백명이 넘을 텐데, 정작 나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계신 내 어머니의 틀니 하나 고쳐드리지 못한다. 어머니날이라는데…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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