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05-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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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음식

내게 있어 여행의 완성은 음식이다. 새로운 곳에서 맛보는 새로운 음식은 나의 지역적 미각과 문화의 지평을 넓혀준다. 그러므로 여행지에서 그곳의 제대로 된 식당에 들르지 못했다는 것은 그곳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말과 비슷해진다.
간혹 지난 여행을 돌이켜볼 때, 그곳의 풍경이나 사람, 경험은 희미하게 잘 생각나지 않아도 그곳에서 찾아갔던 식당, 거기서 먹은 음식만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적이 있다. 바로 그것이 여행과 음식의 떼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여행은 아무나와 함께 해서는 안 된다. 음식에 관한 태도가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는 후회할 순간이 오거나, 심지어 싸우게 되는 일도 생기기 때문에 여행 친구는 조심해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평소 아무리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라도 함께 여행하다보면 서로 생활습관이 달라 불편한 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중요한 기준이 음식에 대한 태도이다.
나 같은 사람은 여행중 몇 끼는 대충 먹더라도 한두 끼는 흡족한 식사를 하기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좋은 식당을 예약해두고 필요하면 정장을 챙겨가기도 마다 않는데 반해, 어떤 사람들은 여행중 모든 끼니를 패스트푸드로만 때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세계 어느 지역에 가서도 한국음식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여러가지 밑반찬과 햇반, 컵라면 등을 챙겨 갖고 다니면서 여행지마다 진한 한국음식 냄새와 자취를 남기고 다니곤 한다. 사람마다 입맛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여행은 음식궁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떠나서는 상호간 매우 화나고 불편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주 사흘간 나를 포함 6명의 여자들이 나파 밸리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 여행은 나의 수많은 여행중 거의 톱 5에 기록될 만큼 좋은 여행이었다는 점을 자랑하고 싶다.
그 6명의 여성들은 20대에서 50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연령층에다, 종사하는 분야도 각자 다른 직업인들이며, 평소 와인을 좋아한다는 한가지 매개로만 만나 교제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렇게 ‘여행 궁합’이 잘 맞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즐거운 여행을 했다.
나파 밸리는 와이너리 구경과 테이스팅이 주목적인 포도원이긴 해도, 미국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들이 오밀조밀 몰려있기 때문에 음식 기행을 한다해도 전혀 손색없는 지역이다.
우리는 그곳의 아름답고 조용한 B&B(베드 앤 브렉퍼스트)에서 이틀간 묵으며 주인 여자가 직접 만들어주는 잊지 못할 아침식사들을 함께 했고, 프랑스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 불란서 식당 ‘비스트로 존티’(Bistro Jeaunty)에서 아주아주 맛있는 저녁을 먹었으며, 다음날 저녁은 최고급 식당 ‘라 토크’(La Toque)에서 예술 같은 세트 메뉴를 풀코스로 즐겼다.
특히 예약부터가 매우 힘든 ‘라 토크’는 전에도 한번 갔다가 홀딱 반한 적이 있는 식당으로, 주인이며 주방장인 켄 프랭크가 다섯가지 코스로 음식과 와인을 서브하는 최상급 레스토랑이다. 음식코스가 일인당 98달러, 각 음식에 맞춰주는 와인 페어링 코스는 62달러이므로 제대로 음식과 와인을 즐기려면 하룻저녁 식사에 팁 포함 거의 190달러를 사용하게 된다.
당연히 너무 비싸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품의 질은 가격에 비례한다. 라 토크의 음식 하나 하나가 얼마나 예쁘고 맛있었는지, 각 코스마다 차이나웨어, 실버웨어, 스템 웨어가 새것으로 교체되는 서비스를 받으며 우리가 얼마나 기분좋은 식사를 했는지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그날 종일 와이너리 시음을 다녔던 관계로 와인 페어링은 두사람만 오더하여 조금씩 나눠 마시려고 했는데, 소믈리에가 우리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2명분을 6명에게 나누어 매 코스마다 골고루 시음시켜준 것이었다. 그런 최고급 식당은 자신들의 명성에 걸맞는 서비스, 고객을 최대한 감동시키려는 자세로 음식을 서브하기 때문에 돈 많이 쓴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좋은 것, 비싼 것을 많이 먹고 잘 먹는다고 해서 여행 궁합이 맞는다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새로운 것, 흥분되는 경험을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 내 식성만 고집하지 않는 자세로 여행에 임할 때 누구와도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여행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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