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Hola! amigo

2005-05-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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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중남미 독립과 아메리카 제국

제288회. 아메리카제국 24. 2차 대전 8. 소련 침공 2
1941년 6월22일, 히틀러는 3,500대의 전차, 7,200문의 대포, 2,800대의 항공기와 300만명의 대군으로 소련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계산착오는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우선 소련이 지닌 힘과 자원을 너무 과소 평가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로 끝나면서 몰락한 전철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밟아 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독일군이 소련의 광대한 영토에 발을 딛으면서 알게 된 것은, 도대체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넓은 광야는 독일군 수뇌부의 기를 죽이기 충분했으며, 또 당시 독일군의 최정예는, 타국에는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전술로 창설된, 기갑부대였다. 그런데 그 광활한 소련 영토에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4분의1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조리 비포장도로였다.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리면 그놈의 길이 그만 진흙 밭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당시의 전차는 지금과 같이 바퀴가 모조리 캐터필더가 아니라 절반 이상이 그냥 타이어로 만들어져 있어 비포장 도로에 비라도 오면 전차병끼리 고스톱이나 치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어 막강한 독일 기갑사단의 기동성을 무력화시켰다.
독소전쟁 개전 후 몇 개월 동안 독일군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레닌그라드 포위작전의 실패로 저울추는 소련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독소전쟁의 분수령을 이룬 중요한 전투였다. 레닌그라드는 러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서 10월 공산혁명의 요람이며, 중요한 항구인 동시에 공업과 문화의 중심지이다.
독일군은 당시 인구 300만의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하여 40개 사단을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전 시민을 동원하여 필사적인 방어에 나섰다. 1941년 8월부터 시작된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3년 1월까지 계속되면서 충원병 등 수백만이 살해되거나 굶어죽었지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어 결국 독일군의 포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소련군과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저항이 어느 정도 격렬했는지, 포위 전 3개월 동안 독일군 17만이 전사하였다. 독일군은 개전 후 6개월간 50만명의 병력을 상실했으며, 보급로가 점점 길어지고 혹독한 소련의 겨울이 닥치면서 수많은 독일군이 홈리스를 닮아갔다. 차가운 북동풍이 불면서 비가 쏟아져도 쉴 수 있는 은신처는 거의 없었으며, 장화는 떨어지고 군복은 넝마가 되어 계급장이 없으면 장교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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