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

2005-04-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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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 개명

일제 때 창씨개명을 했네 안 했네 하며 친일의 척도로 삼는 이들이 있다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그렇게들 모를까?
창씨개명은 우리 조선인들의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미국에 와서 ‘잔’ ‘메리’하며 영어이름 한 개씩 덧붙이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니, 1940년 2월에 시작하여 해방된 1945년 여름까지 조선인의 95%가 창씨개명을 했다는 통계가 있다 하니 조선인으로 한반도에 태어났으면 가슴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살던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일제 36년의 절반을 일정 하에서 살았다. 소화 15년이니까 서기로는 1940년 봄, 고등여학교에 들어간 날 입학식에서 호명을 하는데 ‘가나에 에미요 상’하고 부르니까 ‘하이’하고 대답하는 학생이 있었다.
함경북도와 주변 각처에서 조선인 자녀들만 뽑혀오는 공립 여학교였는데 느닷없이 일본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하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우리들은 그만 키득키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첫날부터 야단을 맞았다. “조용히 해!”
가나에 에미요가 55명중 유일하게 일본애가 되고만 데에는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덕망 높고 자산가인 아버지가 도회 의원이어서 그해 2월에 내려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지도층은 솔선 수범해야 한다”는 총독부 명령에 의해 제1차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한다.
입학식 날 단 한 명뿐이던 일본 이름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는 복도에 긴 종이를 붙여놓고 구 성명(姓名)과 새로 지은 일본식 씨명(氏名)을 나란히 써넣으며 서로 새 이름을 빨리 익히라고 독려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아래층 긴 복도에는 전교생 220명의 이름이 두 가지씩 좍 적혀 있었다. 즉 전원 창씨개명이 끝났다는 얘기이다.
새 이름들을 살펴보면 제법 일본식으로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의 이름들은 자기 성에다 가문의 내력이나 본에서 글자 하나를 떼어 붙였거나 파자를 써서 근본을 짐작할 수가 있 었다.
김가는 가네모도(金本), 가네시로(金城), 가네야마(金山), 가나우미(金海), 가나에(金江), 개성 김가인 나는 개성이 고려시대의 수도 송도였으므로 솔 송자를 붙여 가나마쯔(金松)라고 지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촌스럽게 들리던지 내심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 창씨개명 작업을 계기로 그때까지 집안의 금기로 되어 있던 고려 최후의 저항 선비들 ‘두문동 72인’의 한 분이 우리 가문의 선조라는 말을 그 때 처음으로 듣고 나는 긍지를 느끼며 감격하여 뒷방에 들어가 울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은 공연히 서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인 것이 ‘김’이나 ‘이 아무개’라고 부를 때보다 더 구체적으로 민족의 핏줄을 일깨워 주었으니 말이다.
이씨들은 은근히 조선조의 후예임을 내비쳐 구니모도(國本), 리노이에(李家) 등으로 창씨 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짓을 시켜 놓고 얻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 하려고 한 일은 아닐 테고 후손들이 세계 무대에 나가 이유도 모르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이 일본의 비극이 아닐까?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정말 그랬다면 성을 갈겠다’고 큰소리 치며 살던 우리 민족이 성을 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어른들의 단장의 고뇌를, 후손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창씨개명을 했으니 친일파라고? 이제 그런 가시 돋친 말일랑은 집어치우자.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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