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5-04-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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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한 의문문

미국인 환자 한 분이 요즘 한국말을 배우느라 한창이다. 처음에는 한인 학생들에게 조금씩 배우더니 그 다음엔 커뮤니티 칼리지로 가서 강좌를 듣느라 열심을 냈다.
치료를 마친 뒤에 그가 한국말로 “캄사함네다!” 하기에 웃었더니 그가 곧이어 한국말로 나를 나무랐다. “당신은 나에게 천만에요우 하고 말해야 함네다!”
이렇게 일취월장, 그의 한국어 실력은 늘어만 갔는데 얼마 전에는 한국을 방문한다고 했다. LA에 있는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그의 주장) 그들과 한국말 대화를 연습해볼 기회가 없으므로 아예 여행을 가서 산 한국어를 익히고 오겠단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나의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다른 몇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이 환자가 며칠 전에 인사차 다시 나를 찾아왔다.
한국 여행이 어땠느냐고 묻자 그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거리는 깨끗하고, 한국인들은 친절하고, 음식은 맛이 있고, 모든 것이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었어요. 왜 한국인들은 이미 눈앞에 와있는 사람에게 ‘왔어?’ 하고 또 묻는 겁니까? 그 질문에는 어떻게 답하는 것이 옳습니까?”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한국말에는 정말 이상한 의문문이 많다는 것을 요즘 새롭게 느낀다. 미국에서 태어난 나의 아이도 지금 열 살인데 한국말 반, 영어 반 섞어서 부모와 대화를 한다. 그 애들은 가끔씩 부모가 한국말로 야단을 쳐도 그것이 자기를 야단치는 말인지조차 모를 때가 있는 것 같다.
한번은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는 하지 않고 빈들빈들 놀고 있었다. 숙제를 먼저 끝마치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계속 말을 듣지 않기에 물어보니 천연덕스럽게도 숙제를 학교에 두고 왔단다. “아니, 너 어쩌려구 그걸 두고 왔니?” 다그치자 아이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것은 정말 좋은 질문이군요”
이후로도 몇 번이나 야단칠 일이 있었는데 한국말의 야단치는 대사들은 거의가 의문문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아이가 번번이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너 정말 계속 이럴래? -- 글쎄요. 저도 계속할 지에 관해 생각해 보겠어요./ 아니, 내가 뭐랬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 --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왜들 이러니? -- 아빠, 그것은 매우 훌륭하신 지적이에요./ 왜 이렇게 어질러 놓는 거냐? -- 정말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그밖에도 아이를 나무라는 거의 모든 언사들이 의문문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아이가 그것에 말대꾸하려는 게 아니라 성실히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서 느낀 점들이다.
미국의 한 교육잡지 최근호는 자식에게 해서는 안될 말 일곱 가지를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에 나열된 보기들도 한국말로 번역해 보니 거의가 의문문이다.
어디서 말대꾸야?(자존심에 상처 내는 말)/ 야, 그게 너한테 어울리기나 한단 말야?(자율성 침해)/ 아니, 그것도 몰라?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자신감에 상처내기)/ 이렇게 하고도 내 자식이라 할 수 있겠니?(불안에 빠지게 하는 말)/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니?(의욕 상실) / 엄마, 아빠한텐 너 밖에 없어. 그런데도 넌 그렇게 밖에 안 되니?(부담 주는 말)/ 네가 뭘 안다고 그래?(창조성 말살)
괴상한 의문문은 자존심을 건드린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야고보 3:2)

김범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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