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하는 우리 가족 ‘비전’

2005-04-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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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에서 일반 텔리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 아이들과 함께 텔리비전 앞에 앉게 되면, 나는 텍사스의 카우보이가 된다. 양 옆구리의 쌍권총을 쏘아대듯, 리모컨을 들고 텔리비전을 향해 수도 없이 눌러대며 채널을 돌아다녀 보지만,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온갖 종류의 지저분한 농담들, 성적으로 자극하는 야한 옷차림들, 폭력과 끔찍스런 장면들... 앞에서는 눈길조차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안테나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물론 아이들은 텔리비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하지만 엄마가 도서관에서 엄선하여(?) 빌려온 비디오 테입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나도 가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영화를 별 생각 없이 틀었다가는 아내로부터는 단단히 주의를 듣곤 한다.
언젠가 성경공부를 마치고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 뜻밖에 아내가 텔리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시어머니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동네의 한 한국 비디오 대여점에 들렀단다. 요즘 재밌는 비디오 테입이 무엇인지 묻고는 하나만 빌려 달라고 했더니, 적어도 대 여섯개는 빌려가야 한다고 해서 꼼짝없이 조선시대를 그린 고전 드라마 몇개를 가져 온 것이다.
아내는 다섯 살 때 미국에 와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은 토요한국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다. 시어머니를 위해 빌려오긴 했지만, 이김에 한국 문화도 배울 겸 해서 남편이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비디오 테입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알 듯, 모를 듯한 사극을 보고 있는 아내가 딱한 생각이 들어 텔리비전을 같이 보기 시작했다. 학창시절의 국사 실력을 동원하여 설명해주면서, 재미있게 보다 보니 하나, 둘, 셋… 비디오 테입 몇 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보고는 밤늦게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피곤한 몸을 겨우 이끌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나의 어투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밤새도록 본 사극에 나오는 어느 신하의 억양과 어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력이 되었는가 보다. 이러다간 영락없이 “하나님 아버지, 성은이 망극하여이다”가 튀어나올 판이다. 드라마의 그 뒤가 너무나 궁금했지만, 게서 그만 두었다. 계속적으로 본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언젠가 행복한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에 대해 말씀을 전해 주시던 강사님이 소개해준 글이 생각난다. 그 유명한 다윗의 시편 23편을 번안한 것인데, 웃지 못할 내용이다.
‘텔리비전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붙들어매며/ 나의 모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도다/ 그가 세상 온갖 잡다한 것들을 내 머리에 채우는도다/ 음침한 밤늦은 시간을 지날지라도 텔리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은 텔리비전밖에는 내게 낙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게으름과 나태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너무 바빠서 돌아보지 못하는 사이, 텔리비전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텔리비전이 그들의 비전이 된 것은 아닐까? 텔리비전이 보여주는 대로 세상을 보고, 텔리비전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인생을 생각하고, 아무런 목적 없이 텔리비전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버려진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은 텔리비전을 보는 대신, CD나 테입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성경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재밌는 동화를 듣기도 한다. 엄마는 교회나 집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참 좋아하고, 아이들은 엄마의 이야기 듣기를 참 좋아한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을 때, 나름대로 마음속에 그 이야기의 장면을 그려가며 듣는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이전에 교회에서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나, 그림 성경책이나, 동화책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함께 동원된다. 그리곤 그 그림들 보다 더 멋있는 장면을 그려낸다. 우리는 보고도 잘 못 그리는데, 아이들은 듣기만 하고도 본 것 보다 더 풍성한 상상의 나래를 따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
비전은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그리는 것이다. 언젠가 삶 속에서 그림의 실상이 드러날 때를 기다리면서. 흰 캔버스와 같은 아이들의 마음에 무한히 펼쳐질 그림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기에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오늘 나는 가슴이 떨린다.


김동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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