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검도 체험 또다른 ‘나’를 만난다

2005-04-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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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지키며 인내력·집중력 향상
예절 익혀 자녀 전인교육에 좋아

10년째 연락이 두절되던 대니 김(35·부동산업)으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마주한 대면. 세월이 문지르고 간 지문으로 보기에는 훨씬 더 많은 변화가 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체중이 아닌 사람됨의 무게가 적당히 더해지고 안경 너머 예리한 눈에는 총기가 그득했다. 몸은 20대 때보다 더욱 단단했고 넘치는 생명력이 존재 전체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동안 어디 도량에라도 다녀온 걸까. “나, 요즘 검도 해”로 떼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검도 예찬이 줄줄이 이어진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일주일 두 차례의 수련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데 충분하다는 그의 검도 자랑을 클래스에 참관하고 나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목요일 저녁 샤또 레크리에이션 센터 내. 가출한 청소년들 마냥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한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눈앞에 어르신네가 서 계신 것도 아닌데 문을 연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상 없는 예를 표한다. ‘예에서 시작해 예로 끝난다’는 검도. 본래 생존을 위한 격투기로 시작된 무도가 오늘날 사회체육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예와의 밀착’ 때문이다. 연습과 시합의 상대를 자기 연마의 거울 같은 존재로 여기는데 예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상대를 존경하고 높이는 무도 수련은 유교적 전통 예의범절을 접할 길 없었던 어린이들을 양반 집 자제처럼 공손하게 만들었다.
도포자락처럼 펄럭이는 도복을 갈아입은 단원들의 모습이 흡사 무사의 후예들처럼 멋지다. 특히 고단자들의 검은 도복은 물 맑은 동강에 사는 천연기념물 조류, 검은머리 비오리를 닮았다. 솜털이 아직 뽀송뽀송한 10대 소년이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청소한다. 무림에 들어와 한 수 무공을 배우는데 이 정도 자신을 낮추는 노력이야 기본이 아닐까.
처음 들어온 이들은 위아래 색깔이 다른 도복을 입고 기본기를 익힌다. 3개월의 기본 과정이 지난 뒤 비로소 얼굴을 가리는 호면을 쓰게 되는데 검도인들에게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처음 머리 올리듯 감격적인 날로 호면식도 치른다.
도장 안을 달리며 준비운동을 하고 나선 전체가 일렬로 늘어서 묵상에 들어간다. 죽비 소리가 아닌 징 울리는 소리지만 흩어져 있던 의식을 모으기는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기본기 연습과 전체 준비운동이 끝나고 나면 호면을 쓰고서 대련과 합동 시합연습에 들어간다.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상대에게 한판을 얻어맞고도 감사의 인사요, 상대에게의 공격이 한판 성공했을 때에도 반성이다.
끊임없는 연구와 성찰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자만에 빠짐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는 게 김용문 관장(43·6단·미국 검도연맹 기술위원장)의 설명이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며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주위 사람들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이로 인한 문제도 많이 발생하죠. 사업도 사랑도 결국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닐까요? 검도에서는 상대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을 관찰합니다. 생활이 검도이고 검도가 생활인 매일의 수련이 계속되는 거죠.”
사용하는 이의 인격이 형성돼 있지 않는다면 죽도도 살인무기가 될 수 있다. 칼을 잘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으로 태어나야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자기 자신의 건강을 지키며 세상을 더욱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수련 장소를 “도량”이라 하는 것처럼 검도 수련 장소를 “도장”이라고 하는 이유는 검도가 불교처럼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무도의 연습을 계고(稽古)라 하는데 이는 ‘옛 것을 상고하면서 반복하고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다. 제1과정인 경(經)은 무도의 입문단계. 기본동작의 반복을 통해 강인한 의지와 인내심을 배우는 기간이다. 수업(修業)이라고 하는 제2과정은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하는 혹독한 수련 단계. 제3과정인 술(術)의 단계는 내면화된 기술이 자동적으로 수행되는 예술적 경지다. 도(道)라 불리는 마지막 과정은 자아실현의 궁극의 단계로 선의 깨달음과 동등한 수준이다. 결국 무도의 계고는 불교의 수행과 같은 과정인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에 의해 보급, 발전되었던 격검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검도는 현재 세계 40여 개국에서 검도가 활발하게 보급, 발전되고 있으며 인기 있는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의 검도 인구는 700만명 이상, 우리는 40만명 정도다.
검도는 다른 어떤 운동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어서다. 기합 소리는 정해진 공격목표가 적중되는 순간 상대의 허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하여 내뿜는 대 기염. 이렇게 검과 몸과 기가 하나가 되는 순간, 수련자들은 나도 없고 적도 없는 무아무적, 무념무상의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의 건강한 분출이기도 한 검도. 마음껏 상대방을 때릴 수 있는데 아무리 때려도 다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한 10여분만 몸을 움직여도 도복이 젖어올 정도로 에너지 소비량이 엄청난 검도는 체중 감량에도 효과 만점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서 있을 수 있는 힘만 있으면 평생 검도를 즐길 수 있다는 김 사범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수련생 가운데는 올해 일곱 살인 강원석 군을 비롯해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어린이도 다섯이나 되고 올해 예순 하나인 권오성씨도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한 몸을 놀리며 죽도를 휘두르고 있다.
인내력, 집중력, 결단력을 향상하고 예의범절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키우는 검도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전인으로 교육하기에 더 없이 좋은 방편이다. 젊은 여성 이미현(24·뱅크 오브 아메리카 근무)씨는 검도로 다진 몸매가 참 아름답다. 권오성·권혁준 부자, 남궁 리사, 리처드 천 모자 등 검도 가족들은 검도가 가족의 관계를 더욱 화목하게 만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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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합에 들어가기 전 죽도로 타이어를 내리치며 연습을 하고 있는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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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복의 고름을 매고 얼굴에 호구를 쓰며 마음 밭을 다지는 단원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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