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2-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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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회. 멕시코 6. 사빠따의 민중혁명 1
북미자유무역협정 발효 시점을 맞추어,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의 라칸돈 정글을 무대로 정부 정책에 저항하는 ‘사빠띠스따’라는 반군 집단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1910년 민중 혁명의 영웅이었던 Emiliano Zapata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빠따의 이름을 따서 Zapatista라고 그들 반군 단체를 명명하였다.
멕시코 민중 영웅인 사빠따의 신화는 1919년 그가 정부군의 음모에 의하여 사망한 후에도 멕시코 역사에서 단절 없이 계승되어왔다.
그의 이름은 수많은 저항가들의 상징이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도시나 거리는 수도 없이 많다. 그를 추모하는 행사는 연중 끊임없이 열리며, 1952년 미국 할리웃에서 제작된 영화 ‘사빠따 만세’는 아직까지도 훌륭한 정치영화로 꼽히고 있다.
멕시코인들에게 사빠따의 혁명은 지난 역사가 아닌 의식 속에 살아있는 현재인 것이다.
사빠따는 멕시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모렐로스 신부가 주무대로 활약하던, 멕시코 중남부에 위치한 모렐로스라는 작은 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식민지를 거치면서 토지집중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원주민(ind?ena. 인디오를 말함)들은 대농장(hacienda)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토지소유권에 대한 원주민들의 인식 부족과 스페인인들의 무조건적인 침탈(그냥 와서 남의 땅에 말뚝박고 내 땅이라고 우기는 방법은 당시의 원주민 땅을 빼앗는 보편적인 방법이었다)에 의하여 대부분 빼앗기고 그들이 내쫓긴 곳은 농사에는 쓸모가 없는 황무지나 자갈밭이 고작이었다.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면 소송을 해야 하는데, 글도 모르는 데다 그 소송이라는 것이 농장주와 식민 당국의 결탁으로 몇년 내지는 몇십년씩 끌다가 흐지부지되기가 일수였으며, 재판으로 분쟁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착한 원주민들이지만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어, 무장 농민들이 아시엔다를 습격하여 농장주를 살해하는 일이 가끔 벌어지곤 하였다. 물론 그 대가가 혹독했지만.
이렇듯 불만에 쌓인 농민들에게 1910년 선언된 마테로의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은 혁명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다. 강령중의 한 공약이 농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준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마테로와 사빠따를 위시한 모렐로스의 혁명가들은 사빠따를 혁명군의 지도자로 하고 무장 봉기를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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