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12-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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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여행

크리스마스와 겹친 주말 이틀 동안 우리 가족은 데스 밸리(Death Valley)로 여행을 다녀왔다.
데스 밸리는 몇년전 라스베가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려본 적이 있는데 그 황량한 풍경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으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었다.
이번에도 과연 데스 밸리는 나를 충분히 매혹시켰다. 일단 거기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여행할 때 사람이 없으면 무조건 감동하기 시작하는데 그 곳이 그러했다. 넓디넓은 데스 밸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어쩌다 차를 만나면 반가울 정도로 한산했으니, 그저 그 광활한 자연이 다 내 것인 것만 같아 가슴을 활짝 열고 보고, 느끼고,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드넓은 소금바다의 경이로움, 수백가지 색깔을 가진 돌산들의 신비,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사막의 정적, 거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도하게 누워있는 ‘죽음의 계곡’은 고요하고 비장했다.
특히 해질 무렵 목격한 황혼의 아름다움과 시시각각 변하는 색깔의 조화는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벅찬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돌산들 사이에서 불쑥 올라온 달, 그 달을 본 순간 우리는 다같이 ‘으악’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달은 내가 이 세상에서 본 달 중 가장 맑고, 밝고, 눈부신 달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완전한 보름달이었다. 처음 본 순간 너무 밝고 동그란 데 놀라서 ‘사막에서는 밤에 태양이 뜨나’하고 착각했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니.
그러니까 달은 원래 저런 것인데 우리는 도시에서 그런 달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 달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불쌍하게 여겨진 나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사막에서 보름달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하고는 자연과 인생을 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좋은 여행이었으나 좀 썰렁했던 면도 있었다. 여행중 아들이 “썰렁해 가 무슨 뜻이야?”하고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긴 했는데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썰렁하다’는 원래 춥다는 뜻인데 요즘 아이들은 ‘분위기 깬다’는 뜻의 속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아들은 분명 속어의 뜻을 묻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대충 “누군가 분위기에 안 맞는 농담이나 코멘트를 해서 사람들을 어처구니없게 만들 때”라고 설명해주었는데, 얼마 후 남편이 그 좋은 예로 사용될 발언을 하였다.
데스밸리 가는 길은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15번을 타고 가다가 127번으로 북상하여 2시간 이상 들어가야 한다. 떠나는 날 15번 하이웨이는 아침부터 차들이 많아서 아주 복잡하였다. 당연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라스베가스로 달려가는 차량물결이었다. 그런데 127번으로 갈아타자마자 도로가 텅 비더니 시속 80마일로 달리는 두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다른 차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화려함과 북적댐을 찾아 라스베가스로 달려가지만 우리는 사람도 없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막을 찾아가는구나. 마치 사람으로 북적이던 예루살렘을 놔두고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듯이 말이야”
너무 황당한 발언에 폭소를 터뜨린 나는 잽싸게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들었니? 저런게 바로 썰렁한 말이란다” 아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오케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잘 이해하였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음날 아들이 자신의 선명한 이해력을 보여주었다.
데스 밸리 안에는 샌드 듄(Sand Dune)이라는 모래사막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찍는 소재이고 영화 ‘스타워즈’도 여기서 촬영했다고 한다. 샌드 듄에 잠시 내린 우리는 모래라도 만져보자고 한참 걸어갔으나 얼마 못 가서 돌아왔다. 다음은 그 때 나눈 대화.
숙희: 이런 데는 우리 신발 신고 못 가.
남편: 그럼 남의 신발 신고 갈까?
아들: 에이, 아빠 썰렁해.
남편: 뭐라구? 설렁탕?
아들: 푸하하하! 아빠 진짜 썰렁하다!
이번 여행에서 아들이 얻은 수확은 ‘썰렁하다’는 한국 속어의 뜻을 확실하게 이해한 것.
그런데 정말 다들 썰렁하다는 올 연말, 모두들 마음만은 썰렁하지 않은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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