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내가 끓인 치킨 수프

2004-12-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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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통 6개를 바닥까지 다 비운 홈리스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나는 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신혼 초 아내의 불만은 내가 밥을 너무 빨리 먹어치운다는 사실이었다.
두 시간 넘게 정성껏 차린 상을 밥그릇 바로 앞에 있는 반찬만 집중 공략하여 5분만에 뚝딱 해치우곤 하였던 것이다. 먹는다기보다는 허기진 배에 음식을 채워 넣는 식습관은 신혼의 아내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뜨거운 것은 뜨겁게, 찬 음식은 찬대로 내어놓느라 애썼을 아내의 수고에 대하여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하게 입덧을 해댄 아내 대신 장모님이 한동안 사위의 저녁식사를 만들어주셨던 적이 있다. 밥 냄새조차 얼굴을 찌푸리는 아내를 피해 나는 음식 보따리를 들고 뒷마당에 나가 앉아 먹어야했는데 그것 역시 5분이나 걸렸을까? 개성 장모님이 정갈하게 마련하신 밥상에는 굴비와, 손수 잰 파래김 등속이 즐비했으나 생선은 가시 발리기 귀찮아서 젓가락이 가지 않았고, 김밥이면 모를까 김을 싸먹는 일도 귀찮아서 날마다 반찬이 그대로 남았다.
장모님은 이튿날엔 더욱 더 정성스런 반찬을 담아오셨지만 미련하고 무심한 사위는 그저 햄버거나 사먹게 두지 않는 여자들의 간섭이 귀찮게 여겨질 뿐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났었다.
밥 먹는 일이란 그저 장난감에 배터리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닌가. 움직이면 쓰고 다되면 또 새 배터리 끼워서 움직이고…
그러다가 얼마 전 내가 부엌에서 밤을 새울 일이 생겼다. 홈리스들을 위해서 수프를 끓여가기로 했던 것이다.
매년 날씨가 추워지면 아이들을 데리고 다운타운에 홈리스를 찾아갔었다. 그 동안엔 그저 간단한 선물을 들고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행사를 마쳤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번에는 집에서 치킨 누들 수프를 준비하기로 했는데 200여명이 두 번 정도씩은 줄을 선다고 계산하니 400명분이다.
아이들은 옆집에 가서 대형 들통을 빌려오고 아내는 마켓을 돌며 재료를 구입했다. 나 역시 돕는답시고 도마 위에서 당근을 썰다가 손가락도 베었고 셀러리 줄기 껍질을 벗기다보니 손톱 끝에 퍼런 물도 들었다.
내 생전에 그렇게 많은 닭고기를 한꺼번에 본 적이 있었던가. 오톨도톨한 껍질을 벗기고 한번 삶아 탁한 국물은 버린 다음 육수를 내야했다.
끓어오른 국물에서 거품을 걷고 고기를 썰고, 파스타를 삶아 건지고… 밤은 깊어 새벽 두 시가 되었는데 아직도 끝이 없다.
좁아터진 부엌에서 아내와 엉덩이를 부딪혀 가며 불 위의 들통 여섯 개를 들어냈다, 올렸다,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군, 하며 비로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릇에 담아내면 흔해빠진 수프 한 국자일 것이 이리도 복잡한 공정과 노력을 거쳐야했었단 말인가? 다음날 새벽, 밤새도록 끓여낸 수프와 서빙할 기구들을 챙기며 어렸을 때 읽은 호영송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늘에서 눈꽃송이, 그대에게 전하려 손바닥에 받아봅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 서니 차갑게 얼어붙은 나의 빈 두 손뿐…>
그렇다면 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만져지는 것만을 위해 지나간 시간을 허비해온 것은 아니었나? 들통 6개를 바닥까지 다 비운 홈리스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나는 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김범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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