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 성 칼 럼 세상사는 이야기-새벽송

2004-12-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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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잠에서 깨면 아스라이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성탄절 새벽. 1년에 단 한번 들려오던 ‘새벽송’을 못 듣게 된지가 꽤 오래다.
성탄절을 맞이하니 대전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 난생처음으로 ‘새벽송’에 참가했던 일이 생각난다. 1953년이니까 양 손가락을 몇번 꺾었다 폈다 해야 하나?
당시 대전에는 제일교회라는 큰 교회와 내가 나가던 중앙교회(담임 양화석 목사)의 두 교회가 있었는데 우리 중앙교회에는 피난 민이 비교적 많아서 찬양대원은 거의가 서울 출신이 었다.
여성 지휘자인 김원주 집사님은 대단한 열정가로서 사방에서 굴러 들어온 30여명의 대원들을 얼마나 닥달했던지 우리는 그 시골에서 알아줄 이 없는 명곡중의 명곡 ‘메시야’를 불렀다.
‘할렐루야’가 끝나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닦으며 밑을 보고 서 있는데 좌중에서 “일어섭시다, 일어섭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헨델’이 뭔지. 귀찮은데 왜 이러는지 모르는 할머니들까지 돗자리 위에 모조리 일어서서 박수를 친다.
의자도 못 들여놓은 중앙교회에서 오합지졸의 엉망진창 합창대를 이끌고 피난민 지휘자 김원주 집사님은 해냈다.
6.25와 1.4후퇴 그리고 정전이 된지 몇 달이 지나도 다들 서울로 못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으나 일선에서 총성이 멎었으니 이제는 살 생각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다들 꿈이 있고 행복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찬양대원들은 교회에 모여 ‘새벽송’을 떠났다. 전교인 가가호호 빠뜨리지 않고 넓은 대전시내를 샅샅이 돌며 109장 ‘고요한 밤’과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 두 곡을 번갈아 부르며 다녔다. 다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우리가 미처 당도하기 전부터 앞문을 활짝 열고 기다려주는 집도 많았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교회에서 가까운 우리 집이었다.
밤새 얼마나 걸었던지... 그래도 우리들은 지칠 줄 몰랐다. 지휘자와 두세명이 30대였고 여타 대원들은 모두 20대였으니 한창 나이 아닌가?
평소 교회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여러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게 되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생겨서 좋았다.
김원주 집사님이 끝 집이니까 덤으로 몇 곡 더 부르자면서 자꾸만 팔을 휘두르며 끝내주질 않는다. 고마웠다.
우리들은 뜨뜻한 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어머니가 밤새 끓여놓은 팥죽을 먹었다.
어찌나 식성들이 좋은지 두세 그릇씩을 거뜬히 비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도 일어설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밖이 추운데 다를 쉬다 가라고 권하신다. 노래판이 벌어졌다.
누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에 없으나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어 가끔 머리에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바리톤 정씨가 벌떡 일어섰다.
“술 잘먹는 아들놈을 술독에다 파묻어 놓고, 그 이튿날 열어보니 안주 달라 손짓하네. 럭키 세븐 럭키 세븐 럭키 럭키 럭키 럭키 럭키 세븐”
‘새벽송’을 끝내고 돌아온 예수쟁이 입에서 뜻밖의 술타령이 나오는 바람에 모두들 손뼉을 치며 얼마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정씨는 그때 미국 유학을 떠날 준비중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쯤 LA에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

김순련<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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