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2-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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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회. 멕시코 3. 텍사스의 상실
멕시코에게 통한의 땅인 텍사스는 19세기 초반부터 미국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당시 텍사스는 멕시코의 Coauila주의 소속 영토였다.
미국은 벌써부터 그 땅을 탐내어 잭슨과 애덤스 대통령 시절부터 매입을 제의하였으나 멕시코로부터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1830년이 되자 목화재배가 적당한 이 비옥한 평원에 2만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흑인노예 수천명도 그들을 따라와 인구면에서 멕시코인을 앞지르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목화농사를 지으려고 텍사스에 왔고, 목화농사를 지으려면 흑인노예의 노동력이 꼭 필요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 멕시코는 노예제도를 금지하기 때문이었다(미국이 노예 제도를 폐지한 것은 남북전쟁중인 1862년이다).
텍사스 거주 미국인들은 멕시코에서 탈퇴하기로 작정하고, 1835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멕시코는 산타아나를 지휘관으로 6,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여기서 벌어진 전투가 전설적인 Alamo 요새의 전투이다. 산타아나는 6,000명 중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트라비스 대령이 187명의 병력으로 저항중인 산안토니오의 알라모라는 이름의 한 선교 본부를 공격하였다.
소수의 미군 병력은 10일간을 버티며 멕시코군에게 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살아남은 사람은 병사의 아내인 한 여자와 그의 아기 그리고 노예 한 명뿐이었다.
그 직후 텍사스의 잔여 병력의 사령관인 휴스턴 장군은 승리로 나태에 빠져 있는 멕시코군을 기습하였다. “알라모를 기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악귀같이 달려드는 미군 병력에 의하여 전투는 단 20분만에 종료되었다.
수백명의 멕시코군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텍사스군의 사망자는 단 9명이었다. 멍청한 산타아나는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대패한 데다 그 자신 포로가 되어 미국으로 이송되었으며,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하고 풀려나 터덜터덜 멕시코로 돌아왔다.
텍사스인들은 승리 후 곧바로 헌법을 제정하고 휴스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한 미국은 상황을 즐기고 있던 중, 텍사스가 미국과의 병합을 요청하자 마지 못하는 척 이를 받아들었다.
“달라는 대로 주고 사려고 했는데, 이게 웬 횡재나?” 텍사스 병합을 결정한 포크 대통령이 꿈속에서 한 말이다. 현재 텍사스는 한국의 7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의 가장 큰 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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