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2-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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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3회. 중남미의 독립 12. 브라질 제국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뚜게스를 사용하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인였던 브라질의 경우는 여타 중남미 국가의 독립과 다른 길을 갔다. 1703년 영국과의 메스엔 조약 체결 이후로 포르투갈은 경제적으로 영국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만큼 두 나라간의 유대도 각별하여,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내린 후에도 영국 함대는 자유롭게 포르투갈의 리스본항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포르투갈을 괘씸하게 본 나폴레옹은 1807년 에스빠냐를 점령한 후, 포르투갈을 침공하였다. 다급해진 포르투갈 왕가는 리스본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영국 공사 스트랭퍼드는 영국 해군의 호위 하에 포르투갈 왕실이 식민지 브라질로 대피할 것을 권고하였다.
대혼란 속에서 다급해진 포르투갈 왕실은 영국의 권고대로 영국 함대에 승선하여 브라질로 향하였다.
1만여명에 이르는 왕실 가족과 수행원의 대피가 얼마나 다급했던지, 또 나폴레옹의 추격이 얼마나 신속했던지 그들은 보석과 귀중품 외에는 옷갈아 입을 새도 없어 당일의 옷차림 그대로 배에 올라, 두 달간의 고달프고 처량한 항해 끝에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로항에 도착하였다.
리우 데 자네이로항에 도착힌 포르투갈인들은 두 가지 사실에 매우 놀랐다. 하나는 리우 항구의 빼어난 아름다움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인 Copacabana해변이 있다), 두번째는 도시의 더러움과 초라함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흑인이었다.
19세기 초인 당시의 브라질 인구는 350만 명 정도였는데 포르투갈인은 40만-50만에 불과했고 흑인은 200만명을 넘었다. 도시가 엄청 후져서 극장, 서점, 인쇄소 등도 없었다. 왕실은 리우를 브라질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왕실, 교회, 극장, 도서관, 박물관, 대학 등의 건물을 부지런히 건축하였다. 그 결과 20년쯤 지난 후의 리우는 인구 10만의 화려한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브라질은 주앙 6세의 통치 중 자유무역을 선언하였으며, 영국에 특혜 관세 혜택을 주어 거액의 영국 자본과 값싼 영국 제품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1821년 포르투갈이 독립을 회복함에 따라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귀국하였고 브라질에는 황태자 Don Fernando를 섭정으로 남겨 두었다.
포르투갈 본국은 브라질을 계속 식민지로 두려 했으나 브라질 현지에서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여 황태자 Fernado를 Pedro 1세로 옹립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제정은 1889년까지 계속되다가 군부 쿠테타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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