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2-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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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회. 중남미의 독립 11. 산 마르띤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성취한 후 산 마르띤은 상 페루 (현재의 볼리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복안은 다른데 있었다. 산 마르띤은 진정한 남미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평정한 후, 에스빠냐 세력의 중심지인 페루를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17년 칠레 공략 준비를 마친 산 마르띤의 군대는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가과산을 넘으면서 바람과 어름과 화산재와 맞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칠레 주둔 에스빠냐군의 허를 찔렀고 허를 찔린 에스빠냐군은 차카부코 전투에서 거의 전멸되는 타격을 입었다. 칠레의 산티아고 시민들은 산 마르띤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칠레 총독으로 추대하였으나 산 마르띤은 이를 거절하고, 칠레 독립의 지도자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총독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는 칠레에 주둔하면서 군대의 증강에 힘썼으며, 다음 해 마이포전투에서 에스빠냐군의 잔존부대를 전멸시키므로서 칠레의 독립을 공고히 하였다.
1821년 칠레에서 페루를 공략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산 마르띤은 병력을 영국인 코크레인경의 함대에 승선하여 발파라이소항을 출항하였다.
페루 리마에 입성한 산 마르띤은 부왕을 설득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납득시켰다. 드디어 1821년 페루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페루 전역이 통제된 것은 아니였다. 부왕의 군대는 아직 고원 지방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산 마르띤의 병력도 충분치 못하였다. 게다가 병력을 수송한 영국인 코크레인이 선임을 요구하자 산 마르띤은 페루 국고에서 금은을 꺼낸 다음 리마에서 철수하였다.
바로 그 때 시몬 볼리바르는 해방군을 이끌고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로 남하중이었다. 고립 상태에 놓인 산 마르띤은 볼리바르와 만나 페루의 장래 문제를 상의하기로 결심하여 두 영웅의 회담이 에콰도르의 과야킬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틀간의 회담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성과없이 헤어졌다. 두 영웅의 회담을 기념하는 두 개의 동상이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현재 과야킬의 과야스강변에 세워져 있다.
페루로 돌아간 산 마르띤은 더 이상 혁명을 계속할 여력이 없어 부에노스로 귀환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피했으나, 초창기 공화국 정부로부터 정권에 위험이 되는 인물로 집요한 감시를 당하자 프랑스로의 망명길을 택하였으며, 그가 해방시켰던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72세를 일기로 1850년 망명지인 파리에서 불운했던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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