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2-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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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회. 중남미의 독립 9. 아르헨티나의 독립 1
볼리바르보다 5세 위인 San Martin은 1778년 Argentina의 북부 Misiones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에스빠냐 태생의 장교를 아버지로 태어났다.
마르띤이 7세 때 아버지가 에스빠냐로 귀국함에 따라 그는 에스빠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1세에 군대에 들어가 22년간 복무하였으며,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시 황제에 즉위했던 Fernando 7세가 바로 쫓겨나고 나폴레옹이 형인 조세프를 황제로 즉위시키자 스페인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독립 비밀결사에 투시하였다.
당시의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어떠했을까?
독립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1806년 1600명의 영국군을 태운 영국 함대가 아르헨티나의 La Plata항구에 나타나 순식간에 Buenos Aires를 점령하였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던 부왕인 소브레몬테 후작은 응전할 의사가 없어 가족과 함께 내륙 지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당시 영국은 미국 식민지를 잃어버리고 어디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타국의 점령지를 찝쩍거려서 가이아나, 벨리즈 등 작은 식민지들을 건졌고, 또 적국인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점령중인 식민지에 대한 공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였다.
이러한 본국 지도부의 심중을 잘 아는 부에노스 점령군 사령관인 포팜은 전리품을 산더미 같이 영국으로 실어보냈다. 막대한 전리품을 보고 들뜬 영국 지도부는 남미를 몽땅 먹어버릴 궁리로 부에노스에 주둔중인 영국군에게 지원병을 보내는 한편 칠레와 멕시코를 점령한 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사태가 만만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비밀리에 민병대를 조직하여 라 플라타 지역의 에스빠냐 함대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산티아고 리니에르라는 프랑스인을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영국군을 기습하여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으며, 수비대장인 벨리즈퍼드 대령은 포로가 되었다.
부에노스의 영국군을 위한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별 볼일이 없어진 지원군은 본국에 보고하여 증원군을 요청해 놓고 기다리는 동안 지금의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항을 점령하였다. 패전 소식에 접한 영국 정부는 곧바로 화이트록 장군에게 증원병을 이끌고 부에노스의 재공략하도록 명령하였다. 화이트록 장군은 몬테비데오항에 도착하여 현지의 영국군과 합류한 1만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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